새로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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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콕의 카오산로드였다. 세계일주를 하고 있던 팀을 만나 어울리며 신나게 맥주를 퍼 마시던 곳은. 그들은 내게 샷건(구글링 해보니 동영상이 뜬다. 어쨌거나 아는 사람들은 아는 독특한 맥주 마시기 방법인 것 같다)을 아냐고 물어보았고, 생전 처음 들어보던 그 단어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모르겠지만, 알려준다면 그 방법대로 맥주를 마시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겠지만, 맥주 한 캔을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목구멍으로 쳐 넣었다.

카오산로드에 머물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방콕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무더위에 땀을 한바가지 흘려본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무리는 맛사지와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돌아다니는 일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는 홀로 저녁 식사를 마무리 하고 카오산을 거닐다가 어제 함께 맥주를 마시던 형님들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이미 어제 샷건을 통해서 안면을 튼 관계로, 또 다시 맥주를 들이키다가 누군가가 게임을 제안한다.

"샷건을 하기 싫으면, 지나가는 외국인 한 명을 데리고 와라. 그 사람이 너를 위해 맥주를 마신다면 너는 열외다..."

영어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2년간 대학원에서 원서를 보며 조금 늘어난 실력을 기반으로 삼아. 나는 기럭지 좋은 흑인 남자에게 다가갔고, 망설이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로 당신을 초대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나의 당당함에 놀란 그는 선뜻 일행이 있던 자리로 나를 따라왔고, 시원하게 맥주를 원샷했다.



# 2.

눈을 감으면 언제부턴가 내 안에 니가 그려져.
수줍은 미소도 작은 떨림도 나는 느낄 수 있어

나에게 없는 자유로움을 네게서 느낄 수 있어.
그래서 난 좋아 전혀 다른세계 나와는 다른세계

손을 잡으며 걸을땐 우리 둘만의 바닷가라고 여겼었지.
하지만 아냐 그곳은 너만의 바닷가 내 친구들의 몫

두려워 마 네게도 너만의 미래가 주어졌어.
새로운 세계 설레임 뿐


재주소년.

# 3.

늘상 반복되던.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한 내 삶의 두 번째 장을 끝내버리고 다녀온 여행. 어쩌면 새롭게 시작될 내 인생의 세 번째 장과는 어떠한 연속성도 찾아볼 수 없을만큼 나를 뒤흔들었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벌써 두 달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시간을 보내며 내게는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평생 품고 갈 것이라고 믿었던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회의감.(물론 이 표현이 지니는 의미를 적절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걸 이 포스트 안에서 설명하다간 날이 밝아도 나는 글을 마칠 수 없을 것 같기에 패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곳에서 보낸 열흘. 시간이 만들어내는, 그래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들과의 사건. 깜빡깜빡이는 커서. 예전에 그 커서는 하얀 백지 위에 있었고, 이제 그 커서는 이력서라는 포맷을 지닌 특정한 빈칸 안에 위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어딘가를 향할 지 모를 내게 언제나 위안이 되어 주는 .소중한 한 사람.이 생겨났다.



 # 4.

아주 오랜 시간. 나의 컬러링이었던 재주소년의 '새로운 세계' 를 귀에 걸고 문득 생각난 잡념을 정리해보니 위와 같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자리에 들기 위해 누웠다가 머릿 속에 떠돌던 단상을 정리해보니 바로 그 노래가 생각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래. 지금 이 순간. 민망하지만 서른을 코 앞에 두고 '새로운 세계'라고 이름한 지금은 설레임으로 가득하지만 그와 함께 책임감과 불안함까지 공존한다고 여겨진다. 엊그제 후배에게 던진 e-mail 속의 한 문장.


"불안이라는 감정은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지닐 수 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니, 그것마져도 즐겨."


미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던져버린거니, 너 역시 그와 다르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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