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철학자대회'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7.30 “진리 추구 포기하는건 폭력에 문 여는 것”
  2. 2008.07.30 “인간의 마음이 동물보다 낫다고 단정 못해”
  3. 2008.07.30 “남자·여자 구분은 문화적 상징체계의 산물”
  4. 2008.07.30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제대로 살 수 없어”
  5. 2008.07.30 동아시아, 사고의 변방에서 중심지로 떠오르다

“진리 추구 포기하는건 폭력에 문 여는 것”

|

e메일 대담=나종석 연세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비토리오 회슬레(V. Hoesle·48·미 노틀댐대) 석좌교수는 젊은 이성주의 철학자다. 1960년생으로 일찍이 20대 초반이던 80년대부터 독일철학뿐 아니라 서양 전통철학의 미래를 짊어질 기대주로 촉망받았다. 독일 튀빙엔대에서 22세에 쓴 박사학위 논문 『진리와 역사』에 대해 현대 해석학의 거장 H. G. 가다머 등 선배 철학자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같은 찬사가 한국에서는 가다머가 회슬레에 대해 “2500년 서양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천재”라고 극찬했다는 식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회슬레 본인은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며 이번 중앙일보 인터뷰를 통해 바로 잡혔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칸트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철학의 전통은 근대 서양철학 그 자체로 간주될 정도로 막강했었다. 하지만 독일철학의 영광은 20세기 후반으로 넘어오며 쇠퇴하기 시작한다.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탈근대 포스트모던적 사조의 영향력 앞에서 객관적 진리를 강조하는 독일 근대철학은 ‘지는 해’처럼 보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성 중심의 서양철학 전통을 고수할 차세대 대표선수로 선배 철학자들의 기대속에 급부상한 인물이 회슬레다.

회슬레는 선배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리는 플라톤 및 헤겔철학의 전통을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노력해 왔다. 이성을 통한 객관적 진리의 추구를 철학적 사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그는 이성에 대해 회의하거나 그것을 위험하다고 비판하는 포스트모던적 사상의 흐름과는 근본적으로 관점을 달리한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이성의 억압성과 폭력성을 비판한 반면, 회슬레는 그 같은 이성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현대사회의 각종 위기를 초래했다고 반박한다. 그는 민주주의, 환경위기, 시장경제, 종교 등 각 분야에 만연된 현대사회의 위기는 이성적 사유의 복권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연세대 철학연구소 나종석 전임연구원이 회슬레 교수와 이메일과 전화로 대담을 나눴다.

나종석(이하 나)=당신은 이성을 통한 객관적 진리 추구를 철학적 사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성에 대한 믿음은 현재 많은 사람들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비토리오 회슬레(이하 회슬레)=이성에 대한 모든 비판은 자기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거나 또는 이제까지의 철학적 전통이 틀렸다는 점을 훌륭한 근거를 갖고 입증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텐데, 두 경우 모두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첫째 경우라면 그 비판은 진지하게 취급될 이유가 없고, 둘째의 경우라면 그런 주장 자체가 이성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진리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사람은 결국은 폭력에 대한 문을 여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성만이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된 진리 주장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런 주장들에 대한 비판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비판 자체는 이성적이어야만 한다.

나=오늘날의 이성에 대한 회의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적 사유가 독단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과 연결된다.

회슬레=실제로 일면적이고 억압적인 것이 자신을 종종 이성적인 것처럼 내세우곤 한다. 예를 들어 유럽중심주의와 식민주의 혹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다른 문화에 속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주장하는 한에서만, 우리들은 이런 현상들을 비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비판은 이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전제하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론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점은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나=당신은 21세기가 생태적인 세기가 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미증유의 엄청난 재앙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경고한 바 있다. 동시에 환경위기를 초래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관점뿐 아니라 인간과 여타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심층생태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회슬레=질량(에너지)보존의 법칙 때문에 우리들은 자연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종들을 파괴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자연적 존재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든 그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생태 위기와 관련해 비판적 태도를 지니기 위해 우리는 인간과 여타 생명체들 사이의 규범적 차이들을 생각해야 한다. 가령 인간 생명이 동물의 생명보다 가치가 있다거나 동물의 생명이 무생물보다 가치가 있다거나 하는 규범적 차이들을 필요로 한다. 객관적 관념론은 인간에게서 절정에 이르는 자연에서의 가치 위계질서를 인정한다.

나=당신은 또 요즈음의 많은 철학자들과는 달리 종교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회슬레=물론 파괴적인 형태의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나 역시 부인하지 않는다. 종교가 이성에 대항하는 경우가 특히 파괴적인데, 여러 근본주의들의 경우가 모두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종교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성적인 기독교는 로고스, 즉 이성을 신으로 이해한다. 이성에 바탕을 둔 종교는 인간들에게 가치의 합의를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죽음 이후의 삶까지 포함해 삶을 보다 포괄적 시야에서 바라보게 한다 . 기본적으로 종교는 우리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다. 종교를 통해 이 세계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비로소 의미를 띨 수 있는 것이다.

나=『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최근에 『만들어진 신』이란 책에서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과 함께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생각을 강하게 비판했다.

회슬레=도킨스는 종교의 저급한 형태에 대해 분노한 나머지 그런 형태의 종교만이 다인 양 종교에 관해 거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는 좀 더 복잡한 형태의 종교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21세기에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다만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학문적 사유와 종교적 사유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통찰할 것으로 예견된다. 나는 기독교인이면서도 다윈을 인류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학자들 중의 한명으로 간주한다.

나=당신은 21세기에 동아시아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특히 한국의 미래에 상당히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한국 영화를 자주 보고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회슬레=나는 내 아내의 고향인 대한민국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한국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보다도 더 인상적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1980년대에 민주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성취했다. 게다가 러시아, 일본,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결코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행사하지 않은 여러분들의 조국에 대해 나는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의 기독교인들 중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은 풍부한 불교 및 유교 전통을 갖고 있다. 나는 이런 전통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여러 종교가 갈등 없이 공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경탄하고 있다. 나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이 서구의 위대한 문화적 전통을 창조적으로 더 발전시키고 환경친화적이면서 지속가능한 경제를 세워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기를 바란다.


정리=배영대 기자


 ◇도움되는 책=회슬레가 추구하는 객관적 관념론의 안내서로는 『헤겔의 체계』(한길사)와 『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에코리브르)를 꼽을 수 있다. 객관적 관념론에 기초한 실천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접근을 하고 싶다면 『도덕과 정치』를, 그리고 현대 자연과학, 영미 언어철학과 객관적 관념론 사이의 지적 연결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비토리오 회슬레, 21세기의 객관적 관념론』(에코리브르)를 읽어 볼 만 하다.

 ◇비토리오 회슬레 =1960년생. 독일 튀빙엔대 철학박사. 22세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26세에 교수자격 취득 논문을 제출했다. 곧이어 27세에 환경철학의 거장 한스 요나스 후임으로 뉴욕 뉴 스쿨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교수가 됐다. 독일 에센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미국 노틀댐 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 석좌교수로 있다. 『헤겔의 체계』 『도덕과 정치』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 『철학적 대화』 등의 저서가 있다.

 ◇나종석=1964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독일 에센대에서 헤겔과 비코에 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주요 연구 분야는 서양 정치철학과 독일 관념론이다. 저서로는 『차이와 연대』『삶으로서의 철학:소크라테스의 변론』, 번역서 『비토리오 회슬레, 21세기의 객관적 관념론』등이 있다.
And

“인간의 마음이 동물보다 낫다고 단정 못해”

|

 

대담 = 김기현 서울대 교수

철학자 김재권(74·미 브라운대 석좌교수)씨는 현대 심리철학계의 거장이다. 서울대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1950년대 중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전공을 철학으로 바꾼 이래 심리철학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이론을 계속 제시해 왔다.

심리철학은 영국과 미국을 주 무대로 발전해온 분석철학의 한 분야다. 주로 마음과 신체의 관계를 천착한다. 자연의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마음의 위치는 어디인가, 마음은 신체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가 등을 연구한다.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도 이 같은 심신 문제를 탐구, 마음과 신체는 다르다는 심신이원론을 제기한 바 있다.

현대 심리철학은 20세기 후반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성과를 반영하며 마음의 본성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과학의 손이 닿지 않는 최후의 신비 영역으로 간주되던 인간의 마음을 과학적으로 분해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재권 교수가 있다.

김 교수는 정신현상을 물리현상에 귀속시키는, 이른바 ‘물리주의’(physicalism)를 강력히 옹호한다. 데카르트와 달리 심신일원론을 내세운다. 인간의 마음에 특별히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마음 또한 자연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면서,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을 뇌의 사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다. 서울대 김기현 교수가 그를 만났다.


김기현=인간의 마음은 동서양을 떠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철학자뿐 아니라 종교인의 화두이기도 하다. 마음을 물질에 귀속시키는 당신의 물리주의는 서양의 전통사상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사유에서 볼 때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김재권=마음처럼 신비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없다. 우주는 물질이 격렬히 부딪치고 움직이는 어둡고 황량한 공간이고, 그 드넓은 공간의 아주 미세한 일부인 이 지구에 마음이 거주하고 있다. 이 드넓은 공간의 일부에 어떻게 이런 정신현상이 발생하게 됐는지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초자연적 존재나 초월적 힘에 의존하여 이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것은 한 수수께끼의 자리에 다른 수수께끼를 들여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현상이며 자연현상은 시공간계의 법칙과 사건, 그리고 인과관계 같은 것을 통해 자연계 내에서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현상 또한 신비로운 것이지만, 다윈의 진화론과 최근 분자유전학의 폭발적 발전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명되고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신경과학·인공지능·언어학 등으로 이뤄진 인지과학을 통해 마음의 여러 측면이 연구되고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정보처리·언어처리 능력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그 기반이 되는 신경생물학적인 기제도 밝혀지고 있다.

김기현=마음현상이 신경생물학적 현상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모든 정신현상이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가.

김재권=내가 최근에 낸 책 『물리주의, 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에서도 주장했듯, 나는 여전히 정신적 사건의 대부분이 뇌의 사건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한가지 예외사항을 인정한다. 그것은 감각, 또는 의식의 영역이다. 우리는 커피 향을 맡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여 인지할 뿐 아니라, 그와 동반하는 감각도 함께 느낀다. 이런 감각 또는 느낌의 영역은 인지 영역과 달리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현상의 다른 부분인 인지적 상태는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과, 포괄적인 세계관으로서의 물리주의를 대체할 만한 대안적 세계관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김기현=인간은 우월한 정신세계를 갖춘 만물의 영장으로 간주되곤 한다. 인간의 마음과 동물의 마음의 차이에 대한 생각은.

김재권=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합리적·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으며, 예술품을 만들고 윤리적 규범을 구성하는 등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과 다른 동물의 마음 사이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일 뿐, 이들 사이에 질적으로 구분되는 명확한 선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김기현=인간이 진화의 정도에서 다를 뿐, 정신적 차원에서 다른 동물에 비하여 근본적으로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인가.

김재권=그렇다. 인간의 마음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신적·지성적 능력을 사용해 다리를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의 이기와 예술품을 만들었지만, 그 ‘우월한 마음’이 전쟁·학살·잔혹 행위를 일삼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마음과 지능이 세계를 위해 좋은 것인지 아닌지, 축복인지 저주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인간은 자연계의 일부이며, 우리의 능력은 이 세계 다른 동물과의 능력과 연속선 상에 있다고 믿는다.

김기현=인간만이 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으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없으므로, 인간만이 사고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재권=동물의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많은 과학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구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마음 사이에 언어능력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정도의 차이일 수 있다. 또 인간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동물이 진화하지 못한 것은 단지 역사상의 우연일지 모른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적으로 가능한 입장임에도 아직 명백히 논의된 바가 없다. 이런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마음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김기현=영국의 논리학자 튜링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컴퓨터 공학이 발전하고 인간을 모델로 하는 사이보그에 관한 영화가 나오면서 이 질문은 철학자뿐 아니라 일반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생각하는 기계를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

김재권=기계라는 말은 우리가 현재 또는 미래의 기술을 사용해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이런 의미라면,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술이 마치 우리처럼 생각하고 대화하는 로봇을 만드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단서를 빼면, 이 질문은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인간은 세포·분자·원자 등으로 만들어진 물질적 존재다. 나라는 존재도 세포 단위로 해체됐다가 재조합될 수 있다. 초인간적 기술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초인간적 존재에게 나는 결국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생물학적으로 번식된 존재이므로 엄밀한 의미의 기계는 아니다. 그러나 번식되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됐을 경우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천재에 의하여 만들어진 생각하고 느끼는 기계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능한 신에 의하여 지어진 기계일지도 모른다.

정리=배영대 기자

◇도움되는 책 =『심리철학』(김재권 지음, 하종호·김선희 옮김, 철학과 현실사), 『물질과 마음』(처칠랜드 지음, 석봉래 옮김, 서광사), 『심리철학과 인지과학』(김영정 지음, 철학과 현실사), 『물리주의』(김재권 지음, 하종호 옮김, 아카넷)

◇김재권 =1934년 대구 출생. 서울대 불문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55년 한미장학위원회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다트머스대로 유학을 떠나 철학을 전공. 프린스턴대에서 철학박사학위. 미시건대에서 오랫동안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미국철학회 중부지역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심리철학』『수반과 마음』『물리계 내에서의 마음』『물리주의, 또는 그에 충분히 가까운 것』 등이 있다.

◇김기현 =1959년생.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박사학위. 서울대 철학과 교수. 2008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저서로 『현대인식론』이 있다.
And

“남자·여자 구분은 문화적 상징체계의 산물”

|

 

e-메일 대담=김혜숙 이화여대 교수

 주디스 버틀러(52·버클리대) 교수는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주의 철학자다. 푸코·들뢰즈 등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 영향을 받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대표 주자이기도 하다.

기존의 페미니즘은 남자와 여자의 성별(sex) 구분을 전제한 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했다. 이와 달리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적으로 결정된 성적 정체성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버틀러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별(sex) 조차도 사실은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젠더·gender)처럼 반복적인 모방적 실행을 통해 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성별과 젠더의 구분을 거부하고 이들을 모두 제도적 지배 담론의 산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성 정체성의 해체는 이성애-동성애의 구분조차 권력 담론의 일부로 비판하면서, 동성애를 이성애의 권력적 입장에서 천시할 근거가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여성주의 이론이 여성의 권리 향상 차원을 넘어 남성까지 포함한 소수자의 성애(性愛·섹슈얼리티) 문제로 관심이 확대되는 지점이다. 동성애에 대한 버틀러의 새로운 인식론을 ‘퀴어(Queer)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버틀러의 철학에 대해 ‘여성 없는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김혜숙 교수가 버틀러 교수와 이메일·전화로 대담을 나눴다.

김혜숙(이하 김)=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생물학적 범주를 자연의 법칙, 혹은 천리(天理)로 여겼던 우리의 전통 문화 안에서 보면 당신의 주장은 매우 거북스럽다. 음양사상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보았을 때 더욱 그러하다.

주디스 버틀러(이하 버틀러)=우리의 문화적 상징체계는 그 구조가 특정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매우 부당할 수 있다. 그것이 권력체계로 작동하며 부정의를 발생시킨다면 그에 관한 성찰과 저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이론의 핵심이다.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그 같은 권력체계의 대표적인 예이며, 나는 소수자 권리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본다. 나는 사람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 정체성이나 자신만의 내밀한 욕망조차 문화적 상징체계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김=당신의 이론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성별 범주는 그리 분명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버틀러=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은 인간을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성 범주로 나누는 문화의 상징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의미 부호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실천과 반복적인 흉내내기 행위의 과정 안에서 형성된 것으로, 성적인 범주는 우리의 선택과 실천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불안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성별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협상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김=성정체성의 불안전성이라는 당신의 주장은 여성주의 이론가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성별이 불확실한 것이라면 어떻게 여성주의 운동이 가능한가.

버틀러=성별이 인간 이해에 기본을 이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성별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주어지는가. 성별을 결정하는 것은 염색체인가, 호르몬인가, 아니면 해부학 혹은 다른 생리학적 특징들인가.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성별과 젠더(사회적 성)라고 하는 것에는 ‘이름 붙이기’라는 강력한 실천적 행위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주의 운동은 바로 이 실천적 행위에 개입하여 미래의 젠더 용어들을 만드는 일이다.

김=그런 실천이 가능하려면 기존의 문화적 관습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문화 상황에서는 여성에 대한 직접적 억압보다 여성의 욕망을 부추기는 형태로 권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억압을 의식하기도 힘들고 비판이나 저항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한국에는 소위 명품을 선호하는 ‘된장녀’라 불리는 여성들이 있다. 된장녀란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버틀러=글쎄, 알 것도 같다.

김=이 여성들은 자신이 억압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버틀러=내적 욕망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지 누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니까 그들은 억압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김=많은 여성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된장녀를 지향하는 욕망이 있다면, 어떻게 저항이 가능한가.

버틀러=된장녀의 욕망은 특권과 부를 상징하는 명품에 대한 욕망이다. 명품을 사면서 그들은 잠시 자신이 그 특권적 위치와 공간을 점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초국가적으로 기호화된 상품의 형식으로 권력은 은밀하게 그녀의 욕망 안에서 작동한다. 권력이 상품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권력은 지구화된 자본의 국지적인 형태로 작동하면서, 노동의 성별분업, 가정 내 낮은 여성의 지위를 공고하게 유지시키는 법적 제도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장치들이 여성에게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자각을 통해서 된장녀의 욕망은 더 많은 경제적 권리와 기회에 대한 요구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여성주의 운동이 한국에서는 가족중심의 전통 문화와 흔히 충돌하고 있다. 당신의 이론에서 가족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버틀러=가족은 내 이론 안에서도 중요하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확장된 친척관계와 공동체 네트워크는 전통적인 가족보다 넓은 개념이다. 출산·성장의례·결혼·노화·죽음(장례)처럼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소중한 것들이 좁게 정의된 가족형태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확장된 친척공동체, 사회제도, 의료제도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계를 보장하지 않을까.

김=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나 성전환자들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여러 형태의 사회적 압력으로 고통받고 있는 실정이다.

버틀러=성별 전환자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왜 있는가. 내 생각에는 성규범이 바뀌면 통상적인 세상살이 감각을 잃게 되리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성별이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내 자신의 성별도 마찬가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다. 성적 소수자들이 이 세계 안에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하는가를 스스로 자문해보라. 나의 답은 ‘그렇다’이다.

김=당신의 페미니즘은 성적 소수자 뿐 아니라 모든 소외계층과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이론으로도 읽힌다. 국가나 사회의 통합이란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버틀러=오늘날 국가의 역할은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소수자 권리의 보호는 주요한 고려 사항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국가는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국가의 형태를 찾는 일이다. 다양성의 반대는 일체성 혹은 동일성이다. 일체성의 이념은 언제나 가치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가르는 형식을 제도화하면서 불평등을 지지하는 양상을 보인다.


정리=배영대 기자


◇주디스 버틀러=1956년생. 예일대 철학과에서 프랑스 철학 내 헤겔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UC버클리 비교문학·수사학과 교수. 후기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대표적 이론가로 손꼽힌다. 헤겔의 주체형성 이론, 푸코의 권력 이론, 알뛰세르와 라캉의 욕망이론, 오스틴의 일상 언어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작 『젠더 트러블』을 비롯해 『욕망의 주체들』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등의 저서가 있다.

 ◇김혜숙=1954년생. 시카고대 철학과에서 현대 영미철학 내 칸트철학의 방법론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철학방법론, 여성주의 인식론, 예술철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예술과 사상』,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편저)이 있다.

 ◇도움되는 책들=『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사라 살리 지음, 김정경 옮김, 앨피), 『안티고네의 주장』(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순 옮김, 동문선), 『여성주의철학 입문』 (우줄라 마이어 지음, 송안정 옮김, 철학과현실), 『여성주의 철학』(앨리슨 재거, 아이리스 마리온 영 편집, 한국여성철학회 옮김, 서광사) 등.
And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제대로 살 수 없어”

|

 

 
 일본에서 연간 생산되는 불교학·인도학 관련 서적이나 논문의 양은 일본을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에서 생산되는 양보다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19세기말 일본의 제국주의 시기부터 번성하기 시작한 근대 ‘일류(日流) 불교’가 20세기 세계 불교학계를 제패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세계 불교계를 리드한 일본 학자는 대부분 문헌학자였다. 문헌학의 축적된 자산을 기반으로 이제 일본 불교연구는 사상사쪽으로 눈을 돌리는 추세다. 불교를 일본사상사의 맥락에서 새롭게 연구하는 흐름의 선봉에 선 학자가 스에키 후미히코(59·사진) 도쿄대 교수다. 그는 불교 내 종파나 인물을 중심으로 했던 기존의 연구 방식을 지양한다. 그의 방법론은 ‘불교를 넘어서’다. 불교를 불교 그 자체로만 보지 않고 시대의 흐름과 사상사의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스에키 교수는 일본 불교의 특징을 배경으로 삼아 ‘사자(死者)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장례식 불교’라는 부정적 평가를 오히려 일본 불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승화시키며, 오늘날 불교가 인류에 새롭게 기여할 수 있는 긍정적 측면으로 재해석해 냈다. 허우성 경희대 교수가 스에키 교수와 이메일 대담을 나눴다.

 허우성(이하 허)=한국인들은 538년 백제의 성왕이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처음 전한 일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그 후 1500년 간 일본 불교의 발전과 변화에 대해선 잘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스에키 후미히코(이하 스에키)=일본 불교는 쇼토쿠 태자 이래 사이초 ·구카이 ·신란 ·도겐 ·니치렌 같은 명승대덕을 배출하면서, 인도·중국·한국의 불교와는 또 다른 일본 불교를 만들어 왔다. 일본 불교는 불(佛, 부처)·법(法, 교리)·승(僧, 교단) 삼보 가운데 부처 숭배가 중심을 이루었고, 사자(死者)에의 공양이 불교 신앙의 주요 활동으로 간주된다.

 허=일본 불교를 ‘장례식 불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스에키=집집마다 불단을 차려 놓았고, 죽은 부모의 영혼을 위해 일정한 시기마다 절에서 천도제를 지낸다. 이같은 양태를 ‘장례식 불교’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에 널리 퍼져 있는 불교식 장례는 일본인에게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근본적인 관념을 가르쳐 왔다. 특히 무상감(無常感)을 일본인의 심성에 심어주었다. 이런 영향은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다.

 허=당신의 불교관인 ‘사자의 철학’은 어떤 의미인가.

 스에키=불교를 해석하는 법은 다양하다. 나의 해석법은 ‘죽은 자에 대한 불교철학’ 곧 ‘사자론’이다. 현대인은 오만해졌다. 죽음을 상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죽은 자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도 불교도들이 부처의 죽음 이후 부처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서(禪書)인 『벽암록(碧巖錄)』에서 운문(雲門)선사는 죽은 석가모니 부처와 문답하고 있다. 고불(古佛)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볼 수 있고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허=신도(神道)와 불교의 관계는 어떤가.

 스에키=신도와 불교를 나는 대립적 관계가 아닌 상보적 관계로 파악한다. 이 또한 일본 불교의 주요 특징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에 의해 양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야기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신도와 불교의 분업체계가 일찍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두 종교의 평화적 공존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인간의 탄생과 결혼, 즉 생과 관련된 경사스러운 일은 신도가 담당하고, 죽음과 관련된 일은 불교가 맡고 있다. 한국·중국과 다른 점이기도 한데, 일본에서는 유교보다 불교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기독교는 결혼식을 담당하곤 하는데 영향력이 미미하다.

 허=당신의 주저인 『일본불교사』 결론 부분에 “무서운 늪지인 이 나라에서 불교의 뿌리는 과연 썩지 않고 자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보이는데, 무슨 뜻인가.

 스에키=불교의 토착화와 관련된 문제다. 불교가 뿌리내린 곳이면 어디서나 토착 종교들과 결합하며 변화했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정도가 아주 심하게 변질된 부분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일본 불교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또한 일본 불교의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일본의 승려들이 대처(帶妻·부인을 얻음)와 육식(肉食)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허=한국불교에도 순수성과 세속화가 공존한다. 무속과의 결탁이라든가 권력·금력에 대한 집착이 세속화의 사례다.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이행하며 계율의 엄격성이 이완되는 것은 보편적 현상 아닌가.

 스에키=글쎄다. 일본의 승려들은 대승불교에서는 계율 같은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보살의 내면적 정신이 계율의 외면적 준수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말은 멋지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성실한 수행을 못하는 행태에 대한 변명일 수 있다.

 허=당신은 불교가 일본 근대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보고 있다. 한국 불교계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측면이다. 일본 불교가 근대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스에키=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일본 불교의 관계가 복잡하고 중요한데, 그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 일부 불교도들이 전쟁에 반대하기는 커녕 장려한 것은 문제였다. 죠도신슈(淨土眞宗)의 지도자 키요자와 만시(淸澤滿之)의 제자들 중 일부는 아주 공격적이어서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미타불의 힘에 대한 순종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1945년 이후 불교 각 종파들이 이에 대해 회개하고 책임을 인정했다. 물론 모든 불교도들이 전쟁에 협력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종교 문제는 국가나 전쟁 등의 세속 문제를 초월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전론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허=19세기 이래 지속된 동양의 서양 배우기는 철학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가운데 일본 불교가 세계를 리드한 점은 돋보인다.

 스에키=일본 지식인들은 근대 서양철학을 성실하게 수입했다. 불교가 예외적이라고 하지만, 크게 보면 서양 배우기가 중심이었다. 이제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불교를 포함한 동양 철학이 서양의 변화에 자극을 주어야 하고, 그런 긍정적 자극을 통해 전쟁과 평화, 환경 파괴 등 지구촌의 현안을 푸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양 철학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철학 체계를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동양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 사례를 든다면.

 스에키=달라이 라마의 활동 같은 경우다. 불교의 미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간디의 철학도 중요하다. 동양에는 불교 이외에도 힌두교·유교·도교·이슬람교가 있다. 불교에도 또 여러 전통이 있다. 이런 다양성 자체가 동양 전통의 주요 특성 중 하나다. 이런 다양성 속에 서양 철학의 난국과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수많은 철학적·종교적 원천이 있다. 그 원천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정리=배영대 기자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1949년생. 도쿄대 인도철학과 졸업. 1978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 불교학·일본 불교사 및 불교사상사 분야의 권위자로 손꼽힘. 대표작인 『일본불교사』를 포함해 『일본불교사상사론고』『중세의 신과 부처』『근대 일본과 불교』『메이지 사상가론』『벽암록을 읽는다』 등의 저서가 있다.


 ◇허우성=1953년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미국 하와이대 철학박사. 경희대 부설 비폭력연구소 소장. 저서 『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간디의 진리 실험 이야기』 등 .
And

동아시아, 사고의 변방에서 중심지로 떠오르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철학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제22차 세계철학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WCP 2008)가 올해 서울에서 열린다. 국제철학연맹(회장 피터 캠프)과 한국철학회(회장 이삼열)가 공동 주최하고, 한국조직위원회(의장 이명현 서울대 교수)가 주관하는 행사다.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150여개국 3000여명의 철학자가 서울에 모여 21세기 지구촌의 현안과 미래를 토론한다. 서울 대회의 주제는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Philosophy Today)’.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철학 이벤트가 아시아에서 열리기는 서울이 처음이다. 5년마다 각국을 돌며 열리는 행사의 1차 대회는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고, 터키 이스탐불에서 행해진 21차 대회 총회에서 22차 개최지를 서울로 결정했다. 이때 차기 주최국을 놓고 한국과 경합을 벌인 나라는 그리스였다. 서양철학의 발상지인 그리스 보다 먼저 한국이 세계철학대회를 개최하는 셈이다.

국내적으로는 존폐의 위기가 거론되는 인문학 분야에서, 그것도 가장 덜 대중적이라는 철학을 주제로 이만한 규모의 행사가 열리는 것은 전례가 없다.

국내 철학계에선 이번 대회를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철학계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서양철학계에서 동양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10여년 간의 일이다.

잇따른 가공할 전쟁과 지구촌 생태 위기를 경험하면서 그동안 세계를 움직여온 ‘생각의 힘’ 자체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표준이었던 서양 철학의 문이 조금씩 열리며, 동아시아의 유교·도교·불교 등에서 새로운 ‘생각의 힘’을 찾아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10여년 전만해도 ‘동양에 철학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예사로 나왔다. 22회를 맞는 세계철학대회에서 유교·불교·도교 등 동아시아 철학이 독립된 분과로 대접받는 서울 대회의 의미는 그래서 더욱 뜻깊다. 우리의 전통철학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별도의 분과 토론 모임이 세계철학대회 사상 처음으로 마련되는 것이다.

서양으로부터 철학을 받아들이기에 바빴던 우리가 동아시아의 목소리를 공식적으로 내는 첫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회를 준비해 온 철학자들은 ‘생각의 힘’을 대중과 공유하고 싶어한다. 지난해 11월 30일 ‘한국 철학(계) 발전을 위한 대토론회’라는 자리를 먼저 만들어 철학계의 자성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철학회 소흥렬 전 회장은 “한국의 정치·사회·문화계의 많은 문제점들이 ‘철학의 빈곤’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철학계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철학계 전반의 반성을 촉구했다.

중앙일보가 신년 기획으로 준비한 ‘생각의 힘!’연속 인터뷰는 이같은 우리 철학계 도약의 움직임을 지지하는 코너다.

세계철학대회 한국조직위원회와 공동으로 기획했다. 우리 사회 전반이 ‘생각의 힘’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에서 마련한 자리이기도 하다. 7월 서울에 오는 세계 저명 철학자 7명의 생각을 미리 지면을 통해 차례로 선보인다.


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And
prev | 1 |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