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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25 니까야 체계적 전승…‘친설’ 담겼다
  2. 2009.09.25 “역사성 운운은 사실성 무시한 태도”
  3. 2009.09.25 전재성 회장 “니까야는 창작 아닌 ‘리얼리티’ 자료”
  4. 2009.09.25 권오민 교수, “니카야만 불설 주장은 맹목일 뿐”
  5. 2009.09.24 “니까야 부정은 곧 불교사 몰이해”
  6. 2009.09.24 권오민 교수, “아함도 부파가 승인한 불설일 뿐”
  7. 2009.09.24 마성 스님, 권오민 교수 “아함도 비불설” 주장 반박
  8. 2009.09.24 권오민 경상대 교수,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 탓”
  9. 2009.09.22 왜 달라이 라마인가 / 탁효정
  10. 2009.09.03 버클리 3

니까야 체계적 전승…‘친설’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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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황순일 교수 ‘불설/비불설’ 기고
대승경은 개개인 사경…가감 가능성도 커
‘친설’ 잣대로 동일선상 놓고 볼 수는 없어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권오민 교수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본지 1008호~1014호) 이런 가운데 황순일<사진>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가 권오민 교수와는 다른 견해의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불설’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빨리어는 buddha-vacana이다. 인도유럽어에서 복합어 앞자리에 오는 용어는 단수로도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buddha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 용어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를 단수 고유명사로 본다면 buddha-vacana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며 ‘친설’이라고 할 수 있고, 복수 일반명사로 본다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며 보다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다. 불설과 친설은 모두다 buddha-vacana에 해당되는 한문용어로 볼 수 있지만, 그 외연은 친설보다 불설이 훨씬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양자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종교로서 받아들여졌을까? 불교가 일반적으로 Buddhism으로 영역된다면, 라이벌 종교였던 자이나교는 Jainism으로 영역된다. 자이나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Jina 즉 승리자로 불린다. Jaina는 Jina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승리자들에 속하는’이란 의미를 지니다.

따라서 자이나교는 한사람의 승리자(Jina)의 가르침이 아니라 복수의 승리자들의 교리체계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불교가 결코 Baudhism으로 지칭되지 않았다는 점은 불교가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교리체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이라도 초기경전을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하면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옮겨놓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동일한 경의 이본들 사이에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점들이 발견되기도 하고, 동일한 내용의 가르침이 다른 경들에서 때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하며, 교리적으로 수행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혼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상 남방불교 테라와다(Theravāda)전통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교단은 빨리 삼장(tipitaka)을 이러한 수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 즉 친설 로서 받아들인다. 이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설서로서 확실히 붓다 이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빨리 아비담마(abhidhamma) 문헌들까지도 부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상카시야(Sāmkāsya)와 관련된 전설까지 동원하고 있을 정도로 빨리삼장의 정통성을 부처님의 말씀 즉 친설에서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불교가 학문적으로 연구된 이래에 남방불교 교단의 이러한 주장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빨리어 문헌은 네팔 카트만두에서 발견된 8세기경의 필사본으로, 남방불교 국가에서 발견된 오래된 필사본들은 거의 대부분이 17~18세기경의 문헌으로 추정될 뿐이다.

특히 스리랑카의 경우 15세기 이래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필사본들이 소실되어 버렸고, 12세기 미얀마 문법학자들에 의해서 음운체계가 대대적으로 수정된 필사본들이 미얀마와 태국을 통해 17세기 이후에 역수입된 것들만 남아있다. 빨리경전협회(PTS)에서 출판된 빨리 삼장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역수입된 문헌들에 기초하여 편집되고 로마자화 되어서 출판된 것에 불과하다.

언어적으로 보았을 때 남방불교 테라와다 전통은 빨리어(Pāli)를 마가다어(Māgadhī)라고 주장한다. 고따마 붓다가 자신이 활동했던 마가다 지역의 방언을 사용했을 것임으로, 빨리어가 마가다어라는 것은 빨리삼장의 언어가 고따마 붓다의 언어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전역에서 그 지역의 방언으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아쇼까왕 비문석주의 언어들과 빨리어를 비교해보면 빨리어는 마가다 지역이 있는 동인도 지역의 방언들보다는 서인도 지역의 방언들과 더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빨리어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언어일 가능성 또한 거의 없어 보인다.

한역 아함경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중기인도어인 프라끄릿어 (Prakrit)로 문자화 되어 최종적으로 중국에서 한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이 마치 단일한 부파에 속하는 것처럼 모여 있지만, 장아함은 법장부, 중아함과 잡아함은 설일체유부, 그리고 증일아함은 대중부에 속하는 문헌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 북서인도에서 발견되어 독일과 영국에서 편집되고 있는 싼스끄릿어(Sanskrit) 근본설일체유부 장아함경이 한역 장함경에 비해서 크기가 거의 두 배에 이르고 중아함에 있는 몇몇 경전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역 4아함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빨리 니까야도 한역 아함경도 현재의 형태로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문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란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구전전통의 측면이 강한 초기경전과 문자전통이 강한 대승경전은 경전의 성립과 전승이란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초기경전은 최초에 성립된 후 적어도 200~300여 년간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점차적으로 문자화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불멸직후 라자가하(Rājagaha)에서 있었던 제1결집에서 경․율․론의 삼장이 합송되었다는 율장의 기록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따마 붓다의 사후에 그 직계 제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는 것 또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율장에서 나타나는 제1결집과 같은 규모로 500여명의 아라한들이 모이는 거대한 결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스승의 가르침과 승단의 규칙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승단 차원에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고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암송에 의존한 구전의 경우 인간 기억의 한계 때문에 훨씬 더 쉽게 변형되고 다른 이야기들이 쉽게 삽입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은 구전으로 전승되던 시기에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된 시기보다 훨씬 더 적게 변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초기경전은 한명의 승려에 의해서 암송된 것이 아니라 율장 암송자(vinaya-dhara), 가르침 암송자(dhamma-dhara), 아비담마 목록 암송자(mātikā-dhara) 등으로 표현되는 암송전문승려집단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테라와다 주석전통은 여기에 더해서 디가 합송자(Dīgha-bhānaka) 맛지마 합송자(Majjhima-bhānaks) 등으로 이러한 역할이 점차적으로 더욱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경전이 일정한 숫자의 전문가집단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암송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기억의 한계에 기인한 실수가 전체 승려들의 합송을 통해서 보안되고 정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의 단순한 오기와 의도적인 가감이 은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문자에 의한 전승보다도 구전의 경우에 변형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불교의 승단들이 몇몇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거대한 사원군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많은 수의 암송전문승려들을 조직화하여 체계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기경전은 이 시기에 이미 변형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일한 집단 내부에서는 합송을 통해 변형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지만, 승단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점차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서로 왕래가 부족했던 집단들 사이에서 합송을 통해 변형을 줄이고 부족한 부분을 보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의 다양한 판본들을 조사했던 랑스카진이 「빨리구전문학」이란 논문에서 주장했듯이 부파를 달리하는 개별적인 판본들 사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경이 설해진 장소, 등장인물, 상황전개순서 등과 같은 사소한 것으로서, 교리적 부파적 차이에 기인한 차이는 아주 드물게 발견될 뿐이다.

한편 대승경전은 체계화 분업화된 승단에서 조직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리처드 곰브리치, 폴 윌리엄스와 같은 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탄생을 경전의 문자화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대승불교 필사본의 연대가 기원전 1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인도의 중심부에서 대승불교의 흔적은 기원후 400년 이전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부파불교와 같은 체계화되고 분업화된 승단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다양한 대승불교의 경전들을 고립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자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서 대승불교는 개개인의 생각과 개개인의 체험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환경을 만난 것이다. 구전 전통에서 승단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는 경전은 합송을 통해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어떤 자유로운 생각이나 개인적인 견해가 이미 문자화되어 경전의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경전이 소실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경전이 개개인에 의해 사경될 때, 사경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오기와 은밀한 가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문자의 도입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배경에서 반야경 계열의 초기대승불교 경전들은 판본을 달리하면서 점차적으로 분량이 많아지고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추가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의 학계에서는 초기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전통에 기인한 부파불교의 경전전승전통의 체계로부터 일정 정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비 록 필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만을 불교로 보려는 교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있지는 않지만, 필자는 초기․부파불교 전공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거의 불가능한 소망을 하나 가지고 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변형되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많은 외적 영향을 흡수하면서 번잡해져버린 초기경전에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친설)을 정말 한번 추려내어 보고 싶다.

황순일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1015호 [2009년 09월 18일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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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성 운운은 사실성 무시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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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에 재반론
‘디파밤사’ 1차 사료 부적합은 학계 정설
“니까야 고층-대승경전 신층” 금시초문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이를 비판하고 권 교수가 이를 다시 반박하는 논쟁이 오고갔으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도 니까야는 창작이 아닌 여러 지역서 수집된 ‘리얼리티’ 자료로 권 교수는 고고학‧문헌학적으로 입증된 사실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본지 1008호~1013호) 이에 권오민 교수가 전재성 회장의 반론을 다시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반론자가 바뀌었지만 반론의 내용은 역시 놀랍다. 우리나라 불교학에서 ‘신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초기불교 연구자조차 이토록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유연성[調柔]은 불타의 7선(善) 중의 하나라는데. 필자의 명색의 전공은 아비달마불교이다. 아비달마는 아함과 니카야로 대변되는 초기경전의 일차적인 해석체계이다.

필자는 지난 삼십 년 간 이 불교를 포함하여 이른바 ‘소승’으로 일컬어진 초기불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구호로 점철된 우리 불교학계의 경직된 사고에 대해 비판해왔다. 허나 거기에는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 그러한 내용의 몇 편의 글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투정’이라 자조하였다. 헌대 거의 모든 인도불교사에 기술된 ‘니카야는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이 말 한마디를 소화해낼 수 없는 지경이라니.

거듭 말하건대, 필자는 문제의 논문(「불설과 비불설」) 사족에서 “대승경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친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말하였음에도 반론자마다 그것을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카야도 비불설이다”고 오독하여 필자를 물귀신(Lokāyata의 vitandā sattha)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혹여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힐난할까 두렵다. 딴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신념이 두려운 것이다.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한정사는 불설의 기준이 ‘친설’이 될 수 없음을 지시하는 매우 중요한 말로서, 필자는 오로지 이를 밝히기 위해 4백 매에 달하는 논문에서 이와 관련된 논거만도 30여 종의 대․소승의 경론 상에서 200개 이상을 제시하였다.

전재성 회장은 필자가 어떠한 근거에서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을 친설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는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알고 있다면 ‘명심보감 운운’하며 희화할 것이 아니라 필자가 제시한 논거를 비판했어야 하였다. 필자는 이미 논문의 본문에서 “베단타의 말일지라도 법성에 부합하면 불설이다”는 중관학파의 대표논사인 청변의 말을 인용하였었다.

또한 “도미나가의 대승비불설 충격으로 인해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하였다”고 하여 필자의 논문을 그것의 아류로 여기고 있지만, 중현은 대승불교권도 아닐 뿐더러 일본의 어떤 이가 소승의 아비달마논서를 이용해 대승불설론을 펼쳤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문제의 논문에서 소승의 부파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일어난 불설/비불설론을 통해 ‘불설=친설’이라는 종래의 상식을 비판하고 대‧소승이 다같이 수용한 불설론의 자취를 탐구하였다. 헌대 전 회장은 엉뚱하게도 여기에 고층/신층의 문제를 개입시키고 있다.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쇼카왕 비문에 기록된 7가지 경설을 통해 볼 때 아함․니카야는 고층임이 명백하다”고 하였는데, 이 때 ‘고층’은 친설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논리인가?(『쌍윳따』 하나만 해도 경의 수는 3천에 이른다) ‘까마귀 운운’의 로타야타와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초기경전이나 『숫타니파타』 안에서 고층과 신층을 나눈다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아함‧니카야는 고층, 대승경전은 신층”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금시초문이다.

한편 전 회장은 『아미타경』도 무상․고․무아를 설하기 때문에, 신묘장구대라니도 탐진치의 소멸이기 때문에 비불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아를 설하고, 번뇌소멸만 설하면 불설(=친설)인가? 무아설 등이 불설의 기준인가? 그러나 독자부나 정량부에서는 무아를 설하는 제경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교가 아니다”고 한다면 필자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현장이 인도에 체류할 무렵 유부에 버금가는 세력의 부파였다.

또한 4의설(依說) 자체가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증거라고 하였지만(4의설은 아함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상좌부에서는 4의설을 인정하는가?(마성 스님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혹은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도 경과 율에 위배되면 비불설로 버려야 하고, 경과 율과 논모를 지닌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었다고 한 것도 이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반열반경』의 4대교법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다만 설한 사람인가,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인가?

전 회장은 이에 따라(다시 말해 부파마다 불설/비불설의 입장을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경전 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마성 스님의 반론은 탁월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 성립의 역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실성(史實性)’을 무시한 태도라 할 수 있다. 필자도 일찍이 『인도불교사』(1985, 경서원)라는 제목의 책을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거기서는 대개 경전성립에 관해 불멸 직후 마하가섭 주도의 제1결집(밧지 비구들의 10사 비법(非法)에 따른 제2결집과 상좌부/대중부의 근본분열) 아쇼카왕 시대 목갈리풋타 팃사 주도의 제3결집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인가? 이는 모두 남방 상좌부 전승에 따른 것으로, 결집과 분파에 관한 한 제 전승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제2결집의 경우, 우리는 대개 장로 야사가 밧지 비구들이 행한 금은수납 등의 열 가지 일을 비법으로 지적하자 도리어 거갈마(擧羯磨, 교단에서 일시축출)에 처함에 따라 이를 서방의 장로들에게 알려 이른바 제2결집을 단행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밧지 비구들도 대결집을 단행함으로써 불교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하고 이후 18개 부파로 지말분열하였다고 이해하는데, 그렇다면 대중부의 율장인 『마하승기율』에서는 금은수납을 정법(淨法)으로 인정하는가? 아니다. 역시 비법으로 배척한다. 그렇다면 근본분열에서의 ‘대중부’ 정체는 무엇인가?

제2결집을 근본분열과 관련시키고 있는 것은 오로지 4~5세기에 편찬된 스리랑카의 사서 『디파밤사』뿐이다. 여기서는 계속하여 불멸 100년과 136년 포살을 행하지 않는 6만의 외도 적주(賊住)를 물리치고 상좌부의 분별설을 선양하기 위해 목갈리풋타가 제3결집을 단행하고 『카타밧투(Kathāvatthu)』를 지었으며, 불멸 236년에도 다시 제3결집을 단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성 스님도, 전 회장도 이에 근거하여 상좌부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니카야를 친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사에 대한 몰이해라고 비난한다.

“아쇼카왕에 의해 이루어진 국가적 사업(제3결집)을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한 다른 부파의 사적인 경전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훈계하였는데, 불교의 전승 상에 도대체 몇 명의 아쇼카왕이 등장하는지 알고 한 말인지, 무슨 근거에서 ‘사적 경전 운운’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쇼카왕 때 대천(大天)의 5사송에 의한 근본분열이나 카니시카왕의 후원으로 실행된 유부의 결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사송 또한 대천과 관련지어 설한 것은 오로지 『이부종륜론』뿐이다. 『디파밤사』든 『이부종륜론』이든 일차사료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분야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우리나라의 법경 스님도 “가상적 사서인 『디파밤사』를 역사적 증언으로 수용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으며, 라모트 같은 이는 “결집의 전승은 성전문헌과 그 후의 여러 부파의 성전들(양자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 오래된 것이고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였을 것이다”고 말한다. 최근 우리 학계에 자주 회자되었던 사사키 시즈카는 부파분열을 비롯한 초기불교 교단사에 관한 한 서로 상충되는 거의 모든 정설(定說)은 후대 개변되거나 가탁되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연구를 시작한다.

사실 인도불교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있는 이라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유래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 또한 이에 관한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교를 시대적으로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로 구분하고, 부파불교가 일어나면서 초기불교가 끝나고,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가 끝난 것으로 여긴다. 혹자는 여기에 불타 재세시의 불교라는 뜻의 ‘근본불교’라는 말까지 더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든 근본불교든 그것을 전하는 텍스트가 언제 어떻게 성립하였지 반문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니카야는 기원전 1세기 무렵 문자로 작성되며, 스리랑카에서는 기원 후 5세기까지도 팔리어 삼장의 분류와 구성에 대해 논란을 벌인다. 황순일 교수는 곰브리치 교수의 불교학 방법론을 전하면서 “우리는 팔리 니카야 또는 한역 아함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문헌일 것이란 환상에서 일단 벗어나야 하며,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그리고 교리적 영향 아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변형 또는 발전해 온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라모트 역시 말하였다. 모든 성전들이 부파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초기불교시대에 이미 고정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그렇지만 제1결집 이래 3~4백여 년 간 면면히 구전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사자상승의 계보도 전할뿐더러 경은 송경자(誦經者, sūtrāntika)라 불린 전문집단에 의해 전승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른바 율상수나 법사들의 계보는 부파마다 다를뿐더러 후대 작성된 것이다. 송경자 또한 다수의 부파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도 확인된다.

그런데 왜 송경자가 필요하였을까? 다만 경을 암송하는데 전문적 능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인가? 필자는 이들이 정법의 소멸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잡아함』제640경을 비롯한 다수의 전승에서는 샤카․야바나 등 서방에서 침입한 왕들의 무자비한 파불(破佛)과 불교 내부의 분쟁으로 인한 정법의 멸진을 전하고 있으며, 논서에서는 “불타 교법은 누구에 의해 유지 전승되는가?”라고 끊임없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불교에 누가 될지라도 불교학은 그것이 ‘학’인 이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전 회장은 니카야는 아무런 단절 없이 전승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목갈리풋타가 비판하였던 이설자는 누구인가?

『디 파밤사』에서는 외도 적주라고 하였지만, 리스 데이비드 부인은 『카타밧투』의 이설자로서 독자부, 정량부, 설일체유부, 대중부, 안다카, 계윤부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들은 왜 외도 적주로 불렸을까? 그들은 상좌부의 무엇을 비판하였고, 이에 대한 상좌부의 대응논리는 무엇이었던가? 상좌부는 그들을 끝끝내 배척하여 불교교단에서 몰아내었던가?

이상과 같은 학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 한 오로지 상좌부 전승의 니카야만이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으로, 이를 상대로 논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논쟁의 생명은 모름지기 논거의 제시와 상대방 논거(또한 비유)의 비판적 검토에 있기 때문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1014호 [2009년 09월 11일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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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 회장 “니까야는 창작 아닌 ‘리얼리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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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 회장 권오민 교수 비판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까지 부정해선 안 돼
法性만을 고집할 경우 ‘명심보감’도 불설이 될판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고,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이를 비판하고 권 교수가 이를 다시 반박하는 논쟁이 오고갔다.(본지 1008호~1012호)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지난 80년대 말부터 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해오고 있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마성 스님의 입장을 지지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최근에 법보신문에서 권오민교수와 마성스님 사이에 대승불교 경전과 초기경전인 아함과 니까야 사이의 불설비불설 논쟁이 뜨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대승비불설 논쟁은 테라바다 불교권이나 니까야 연구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권 자체 내에서 제기된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도(富永仲基, 1715~1746)가 북전의 한역 팔만대장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출정후어(出定後語)」라는 책을 출간, 일체경은 불설이라 일컬어지지만 대승은 불설이 아니고 대승의 경전은 모두 후인(後人)의 가탁이라고 했다. 그의 대승비불설론은 일본불교계에 심대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한역경전 가운데 오히려 소승이라고 여겨졌던 아함 경전류야말로 유일한 불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대승비불설이라는 것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이고 극단적인 것이었다면, 그에 대한 반론으로서 권오민 교수가 ‘대승경이 비불설이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비불설이다.’라는 주장도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이 논리는 마치 까마귀의 살이 검은 색이 아니므로 까마귀의 뼈도 검은 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너무 거칠고 무의미한 말이다.

여기에 마성스님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대승불교의 경전을 두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한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미타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도 극락조가 부르는 노래는 “무상‧고‧무아”-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부처님의 가르침-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수경의 다라니인 신묘장구다라니의 핵심 사상은 탐진치의 소멸-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열반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대승불교를 비불설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권 교수의 말대로 한편 대승불설론의 모든 아비달마적 이론은 아함의 한 경전인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생각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명료하지 않은 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명료한 경(了義經)에 의지하라.’라는 네 가지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 논사들은 아함에 의거하여 대승불설론을 합리화했다는 역사적 근거가 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역사성을 무시한다면, 적어도 대승아비달마 논사들이 불멸후 천년 경에 단지 주어진 경과 율에 나타나고 법성(法性)이나 정리(定離)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대승도 불설임을 입증했다는 권 교수의 주장에 아무도 반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성스님은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의 친설이 아님은 명백하다고 주장한 것은 지나친 표현이 있지만, 형이상학적인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는 논쟁의 핵심에 역사성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권 교수의 주장에 대한 탁월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각 부파나 아비달마 논사의 입장이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경전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오민 교수는 ‘사실 제1결집에서 송출된 법 즉, 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까야로 발전했는지 기원전 1세기까지 300여 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때에 이미 대승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권오민 교수는 위의 주장에서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 사이에 대승경전의 편찬이 아함‧니까야 보다는 신층인 것임을 암시하면서도 애써 부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아함‧니까야가 대승경전 보다도 고층의 경전임을 암시하는 역사적인 결정적 증거가 있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논쟁은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른 관점 역사적인 고층‧신층의 문헌문제로 대체하여 접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아직까지 해독 가능한 가장 오래된 문자의 기록은 아쇼카 왕의 비문이다. 인도에서 오래된 고층의 문헌이라면 당연히 아쇼카 왕의 비문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게 마련이다. 아쇼카 왕(대략 B.C. 268~232년)은 그의 캘컷타 바이라트(Calcutta-Bairāṭ) 비문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선설하신 것으로 그 선법이 오래 지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빠알리 니까야의 여러 경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비문을 완역하면 아래와 같다.

마가다의 왕 쁘리야닷씨는 승단의 수행승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에게 건강과 매사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존자들이여, 얼마나 짐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존경과 신뢰를 펼쳐나가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어떠한 가르침이던지 그것은 훌륭하게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존자들이여, 진정한 가르침이 어떻게든 오랜 기간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길에 관하여 나에게 떠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존자들이여, 짐은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경들을 항상 배우고 사유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① ‘제어에 대한 선양(Vinayasamukkasse)’, ② ‘고귀한 삶(Aliyavasāni)’,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Anāgatabhayāni)’, ④ ‘성자의 노래(Munigāthā)’,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Moneyasūtte)’, ⑥ ‘우빠띠싸의 질문(Upatissapasine)’,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Lāghulovāde)’.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재가의 남녀 신도들도 이 성스러운 경들을 듣고 사유하여야 합니다. 존자들이여, 이 기록은 이와 같은 목적 즉 백성들이 짐의 의도를 알도록 하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위와 같이 아쇼카 왕의 비문에는 일곱 경이 인용되어있다. 리스 데이비드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④ ‘성자의 노래’는 이 숫타니파타의 ‘성자의 경(Stn. 207~221)’을 말하고, 꼬삼비나 빈터닛쯔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은 숫타니파타의 ‘날라까의 경’의 후반부(Stn. 699~723)를 말한다. 찰머에 의하면, 날라까 경은 실제로 ‘성자의 삶에 대한 경(Moneyyasutta)’이라고도 불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꼬쌈비에 의하면, ⑥ ‘우빠띠샤에 대한 질문’은 숫타니파타의 ‘싸리뿟따의 경’을 말한다. 우빠띠샤는 싸리뿟따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라훌라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인 학설로는 맛지마니까야의 ‘라훌라에 대한 교훈의 작은 경(MN. 147: Cūlarāhulaovādasutta)’을 의미할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① ‘제어에 대한 선양’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올바른 유행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서두름의 경’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제어라는 말의 어원인 비나야로 보면, 율장과 관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무라카미 신칸(村上眞完)에 의하면 초전법륜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장의 초전법륜에 나타나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최상의 계율이기 때문이다. ② ‘고귀한 삶’에 대해서는 디가니까야(DN. III. 269~271)에 나오는 ‘열 가지 성스러운 삶(dasa ariyavāsā: 十賢聖居)’ 또는  앙굿따라니까야(AN. II. 27~28)에 나오는 ‘네 가지 성스러운 전통(四聖種: cattāro ariyavamsā)’과 일치한다.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앙굿따라니까야(AN. III. 100~110)의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五種怖畏: pañcanaṃ anāgatabhayam)’을 말한다. 따라서 아쇼카왕의 캘컷타 바이라뜨 비문에 언급된 일곱 경들 가운데 적게는 세 경, 많게는 다섯 경이 숫타니파타에서 유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대승불교 경전에서 극찬해 마지않는 아쇼카 왕의 비문에 직접 언급된 유일한 불교의 가르침들은 모두 니까야에 현존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두고 권오민 교수가 불멸후 300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대승경전들이 당시에 존재했다면, 전세계에 불교를 홍포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던 아쇼카왕의 비문에 어떻게든 경명이라도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대승아비달마논사들은 경전만을 접하고 불설비불설 문제를 다루었을 뿐 이러한 역사적 고고학적 사실을 접하지 못했다. 세친이나 청변, 중현이 제일결집은 모두 산실되었고 그 후 무량의 경전이 은몰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은몰된 무량의 경전이 아쇼카 재위시까지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인가?

지금 인도에서 고대사로서 정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고고학적 발굴과 아쇼카왕의 비문과 니까야에 등장하는 제왕들의 통치와 사회문화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니까야는 단순히 편집되거나 편찬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가정하지 않으면, 서술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구성을 통해 수집된 자료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은 고고학적 발굴로 대부분 입증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함‧니까야가 후대에 편찬된 대승불교의 경전보다 오리지널하고 고층적인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권 교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니까야에 나타나는 구전을 수집하였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무시하거나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부파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테라바다의 전승은 단지 상좌부라는 부파의 전승만은 아닌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불멸후에 불교는 수많은 부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아쇼카 왕은 불법에 귀의한 뒤에 수행승의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 수행승들-수많은 부파불교의 교단에 속한-가운데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어떤 자들은 불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고행에 열중했다. 어떤 자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법과 율을 파괴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수행승들 가운데는 포살과 안거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쇼카 왕은 이러한 스캔들을 궁극적으로 끝내기위해 장로 목갈리뿟따 딧싸(Moggalliputta-Tissa)로 하여금 교단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부파불교의 수행승들의 잘못된 교리 즉, 영원주의(sassatavāda)와 허무주의(ucchedavāda)를 세심하게 배제하여 제일결집이후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던 빠알리 니까야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사업을 단지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했던 다른 부파의 사적인 소의경전들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함은 원래가 범어로 쓰여졌고, 설일체유부의 것이라고는 하나 빠알리 니까야와 3분의 2가 일치하고 나머지도 유사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경전 가운데 니까야와 함께 고층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빠알리 니까야의 게송언어는 언어학적으로도 베다어에까지 소급하는 경전으로 가장 고층에 속하는 경전임이 입증된지 오래되었다.

아비달마 논사들의 주장대로 법성을 불설의 준거로 삼는다면, 극단적으로 『명심보감』에 법성이 있다면, 그것도 불설일 것이다. 오늘날 누가 과연 법성이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불교에는 대소승을 합하여 방대한 경전 군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신층과 고층을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구분하여. 아함‧니까야와 다른 경전으로 구분한다면, 확실히 아함‧니까야가 고층에 속하며, 다른 논서나 대승경전은 그것을 토대로 성립되었거나 아함‧니까야의 본래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신층의 경전임이 자명하다. 단지 아함‧니까야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고, 대승경전은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과 깨달은 제불의 가르침을 담은 신층의 경전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1013호 [2009년 09월 04일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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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교수, “니카야만 불설 주장은 맹목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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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교수 마성 스님에 다시 반론
사람에 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게 불교
니카야가 곧 부파…상좌부 사대주의 버려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카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

이에 권오민 교수는 다시 아함과 니카야 또한 설일체유부 등 부파에 의해 승인할 불설일 뿐이라고 반박했고, 이에 마성 스님이 다시 권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상좌부에 대한 이해부족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권오민 교수가 또다시 마성 스님의 반론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정말이지 명색이 학자라는 이가 이런 식의 논쟁에 명함을 내밀어야 하는지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이라는 권위를 빌려 다만 그럴 듯한 말로써 독자를 현혹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성 스님의 반론에 다시 재반론한다.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필자는 문제의 논문(「불설과 비불설」, 『문학/역사/철학』 제17호)을 아함과 니카야가 비불설임을 밝히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불설’이 아니라고 단정한 일도 없다. 필자가 그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불교사에서 사라진 논사인 경량부의 상좌 슈리라타(Śrīlāta)의 학설을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중현의 『순정리론』을 통해 재구하는 중에 그가 설일체유부에서 제시한 아함경설에 대해 빈번히 비불설론을 제기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한 유부 측의 대응을 탐색하던 중에 다양한 문헌적 변천과정을 거쳐 불설의 정의와 4의설(依說)이 생산되고, 이에 근거하여 불설의 취사(取捨) 개폐(開閉)와 더불어 새로운 경전이 찬술되었으며, 나아가 대․소승의 여러 논사들의 불설론의 초석이 되었음을 알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즉 필자는 평소 “역사적으로는 비불설이지만 사상적으로 진정한 불설”이라는 우리학계의 대승 불설론의 논거가 너무나 허약하다고 생각하였기에(이를 역으로 말하면 “소승경은 역사적으로는 불설이지만 사상적으로 비불설”이라는 이상한 판단으로 변질될뿐더러 소승에서는 대승의 사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족(蛇足)’에서 단 한번 “대승경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친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필자는 계속하여 말하였다.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불설/비불설 논쟁은 맹목의 논쟁일 뿐이다. 그러한 논쟁은 구호나 선전에 근거한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것일뿐더러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한다. 불교는 결코 교조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열려있었으며, 진실(법성)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중략)--그들은 결코 ‘역사’에 근거하여 불설/비불설을 논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불설/비불설의 기준은 정리(正理)였고 법성이었다. 아함(āgama, ‘전승되어 온 것’이라는 뜻)은 전통이었지만, 역사적 사실로서의 ‘불설(즉 친설)’은 아니었다. 이는 당시 초기 부파불교에서도 인정한 바였다.”

예컨대 중현은 “상좌 슈리라타는 잡아함 제322경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결집에 포함된 것(혹은 聖敎=아함)이라는 사실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거나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의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리발마는 “어떤 성문의 부파에서 [전승한] 경은 다만 성문이 설하였을 뿐이다”는 물음에 대해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지도 않았으며, “그렇다. 저들의 경은 모두 가짜이다”고 부화뇌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러한 법의 근본은 다 불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그들은 모두 불타의 말씀을 전하였을 뿐이다”고 말하고서 비나야 즉 율장을 논거로 제시하였으며, 『대지도론』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 비록 어투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현존 팔리율을 비롯한 거의 모든 율장에서 불설에는 불타가 설한 것뿐만 아니라 성문․선인․천․변화인이 설한 것도 있음을 전하고 있다.

헌데 마성 스님은 상좌부의 니카야는 아함을 포함한 저들의 경전과는 위상이 다르다고 말한다. 아니 상좌부는 ‘부파’가 아니라고 말한다. 상좌부는 교단사적으로 정통이기 때문에 성교(Buddha sasana=니카야)가 바로 불설(Buddha vacana)이고, 정법이라고 말한다. 아함과 니카야를 동류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상좌부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테라와다(上座部)는 글자 그대로 ‘장로들의 정교(正敎)’로서 불멸 후 제1결집을 주도했던 500명의 장로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서 “이들은 스스로 ‘붓다의 적자’임을 자부하고, 2,500년 동안 단절 없이 전통을 계승해왔다”고 단정짓고 있다.

상좌불교의 전도용 팜플렛에나 나옴직한 이 같은 말이 어떤 인도불교사에 기술되어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러한 발언은, “여호와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모두 사교이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참으로 무례한 발언인가? 비록 댓글이기는 하지만 ‘대승경전을 모아 불지를 것’이라는 극단적이고도 독선적인 발언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도대체 니카야(nikaya)가 무슨 뜻인가? ‘부파’라는 뜻 아닌가? 부파에서 전승한 경전을 의미하지 않는가? 세친은 『구사론』에서 독자부가 전승한 경전을, 『석궤론』에서 18부파나 부파에 의해 결집된 경전을 ‘니카야’라고 부르고 있다. 니카야는 각각의 부파에 의해 불법(buddha sasana, 교법)으로 승인된 불설(buddha vacana, 말씀)의 모음집으로(팔리어에 대문자 소문자가 있다는 말도 금시초문이다) 각 부파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어떤 부파든 자신들이 채택한 불설을 정법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혹여 독자들께서는 ‘불설(혹은 불교)’이나 ‘불법’은 다 그게 그것이지 무슨 말장난하고 있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불법은 부파에 의해 규정된 교리나 신조(sasana)이기 때문에 다만 불타의 말씀을 의미하는 ‘불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두 말의 차이를 간과한다면 앞의 중현의 말도, 『대지도론』의 “그대들이 들은 것은 불법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다”고 비난한 비구 복색의 마구니의 말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불법’은 마구니가 채택한 교리이고, ‘불교’는 통상의 불타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부파에서 전승한 ‘불설’은 어떤 것인가? 『대반열반경』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어떤 비구가 어떤 법문(경․율․교법)을 ① 불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② 대다수 박식한 장로들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③ 경과 율과 논모(論母, 주석)를 지닌 다수의 비구로부터, ④ 혹은 그러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그의 말을 잘 듣고 단어와 문장을 잘 파악한 다음 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율에 나타나는지를 검토하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불설로 판단하여 버려야 하고, 그러하다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각묵 스님 역, 『디가니까야』2에서 발췌)

이른바 4대교법(大敎法,mahā apadesa)이라 일컬어진 이 법문은 이후 개개인에 의해 수지 전승된 스승의 교법을 불설로 확정짓는 기초가 되지만, 이에 따르는 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은 것도 경과 율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하고,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조차 비불설로 배척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자(說者)가 아니라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범본 『대반열반경』이나 『유부비나야잡사』에는 이 법문에 앞서 “경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 설해지며, 마침내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밖으로 드러난 말에 의지하지 말고 거기에 담긴 뜻에 의지하라, 언어를 매개로 한 상대적 인식(識)에 의지하지 말고 통찰의 직관지(智)에 의지하라, 그 뜻이 애매하거나 부실한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경에 의지하라”는 4의(依)가 성립한다.

헌대 마성 스님은 상좌부에서는 4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비담마를 승법(勝法,dhammavisesa)으로 이해하는 상좌부에서. 그렇다면 4대교법은 어찌 인정하는가? 불설의 취사선택과 편찬은 부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유부비나야잡사』에는 “[각각이 전승한] 교법에는 진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대비바사론』에는 “불멸 후 어떤 이들은 수트라(經) 중에 거짓된 수트라를 안치하였다”고도 하였다.

파승(破僧)에 관한 언급 또한 반론은커녕 자신의 주장을 부정하는 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최근의 한 연구(佐々木閑, 이자랑 역, 『인도불교의 변천』)에 따르면, 파승의 정의가 어떤 시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법륜(정법)의 파괴(破法輪僧)에서 갈마의 파괴(破羯磨僧, 동일교구 안에서 2部의 승가가 포살과 갈마를 별도로 시행하는 것)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교리를 달리하는 각각의 부파가 갈마를 함께 시행함으로써 하나의 불교승단이라는 공통의 인식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바야흐로 부파불교가 성립할 수 있었고, 대승불교 또한 이 같은 계기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자신들만이 정통이라 주장하는 상좌부에서의 파승의 정의는 무엇인가?(스님은 ‘승가의 분열’로 정의한다. 咄!) 과연 상좌부에서는 스님의 말처럼 파승으로 떨어져나간 다른 부파를 인정하지 않았던가? 정말 그러하였다면 상좌부는 대단히 고립적이고 독선적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앞의 연구에 의하면 그 반대이다.

헌데 “비유하면 조계종은 상좌부에, 군소종단은 부파교단에, 전통과는 계통이 다른 원불교는 대승교단(보살가나)에 해당된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무슨 근거로 그같이 말한 것인지 참으로 신통하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하다. 부파(성문)교단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보살가나’라고 하는 것도 히라카와(平川彰)가 제시한 개념으로 생각되는데, 이 또한 앞의 사사키 시즈카를 비롯한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아마도 상좌부가 전승한 니카야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며, 정통불교라는 맹목의 폐쇄적 신념에 기초하는 한 당시 제 논사들의 불설론도, 필자의 ‘사족’ 한 마디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성 스님의 재반론의 핵심은 “필자의 논의가 상좌부의 정통성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필자는 전도사도 종파주의자도 아니기에 어떤 ‘논리의 함정’에 어떻게 빠졌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스님이야말로 새로운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구 호’나 ‘선전’은 현실의 불교에서 전도를 위해 응당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불교학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근간 『불교학과 불교』에서 누차 강조하였지만, 이와 더불어 불교학도의 글 쓰기 문제점이나 인도불교사에 관한 몇 가지 근원적이고도 강고한 선입견, 사료를 취급하고 획득하는 방법 등 못다 한 이야기는 다른 지면을 통해 밝힐 것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1012호 [2009년 08월 27일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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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 부정은 곧 불교사 몰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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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 스님, 권오민 교수에 재반론
니까야는 상좌부서 2500년 간 계승한 경전
계율과 교단사 외면해 스스로 모순에 봉착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본지 1009호 19면) 이에 권오민 교수는 다시 아함과 니까야 또한 설일체유부 등 부파에 의해 승인할 불설일 뿐이라고 반박했다.(본지 1010호 10면) 이에 마성 스님이 다시 권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필자의 반론문에 대한 권오민 교수님의 성실한 답변에 감사드리며, 평소 학문하는 자세나 열정과 성실함을 잘 알고 있기에 존경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려 작성한 논문을 필자가 오독한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문제의 논문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급히 읽고 반론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임을 인정한다.

이 논문의 가치는 불설/비불설 혹은 요의/불요의(유부와 대승)의 논쟁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막연히 각 부파간은 물론 대·소승 간에 불설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논문에서 유부의 불설론은 물론 하리발마나 슈리라타 및 무착·세친·청변의 불설론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밝힌 점은 높이 평가한다. 만일 여기서 논문을 끝내고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필자가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논자는 반론문에서도 이 논문이 ‘종파적 논쟁’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 그러나 논자의 주장 자체가 종파적 논쟁이다. 오늘날 학자들의 논문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불설/비불설을 간택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온갖 학문적 방법론을 동원해 붓다의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설/비불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논문에서 불설/비불설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상, 이 문제는 결국 종파적 신념을 초월할 수 없다.

논자는 반론문에서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승단에서는 법맥이 어떻게 전승되었는가에 따라 정통성을 인정받기 때문에 생명줄과 같다. 현재 상좌불교에서 단절된 비구니 승가를 복구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교단사를 무시한 연구는 철학적으로나 사상사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나, 승단의 전승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승단이 단절되면 종교로서의 불교는 소멸되고 말기 때문이다.

논자는 “당시 논사들의 증언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들이 불설이라고 주장했던 논리적 근거는 타당했는가. 전통을 계승한 상좌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불설의 근거로 삼았던 잣대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두 가지 잣대만 제시하고 있지만, 후술할 세 번째 잣대는 전통성에 대한 기준이 된다.


첫째, 불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원래의 잣대는 ‘사대교법(Mahāpadesa)’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사의(四依)를 추가함으로써 기준이 되는 잣대를 변경시켰다. 그래야 불설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팔리본 『대반열반경』에서는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면 불설이다’였지만, 유부 『대반열반경』에서는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며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다’로 잣대를 약간 수정한다. 나중에는 다시 이를 근거로 사의를 추가하게 되었다.

둘째, 상좌부를 제외한 제 부파와 대승에서는 ‘불설(佛說)과 성교(聖敎)’를 엄격히 구분했다. 이것도 앞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래야 이를 근거로 법성과 정리에 합치하기 때문에 불설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좌부에서는 처음부터 ‘불설과 불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팔리어 ‘붓다와짜나(Buddha-vacana)’는 ‘붓다의 말씀’(佛說, the word of the Buddha)이고,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는 ‘붓다의 가르침’(佛敎, the teaching of the Buddha)이다. 즉 불설이 곧 불교라는 뜻이다.

그런데 후대에 Buddha-sāsana(佛敎)를 성교(聖敎, Skt. buddha-śāsana)로 변경시키고, 여기에 아함이나 니까야를 포함시킨다. 팔리어 대문자 Buddha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을 뜻하지만, 소문자 buddha는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상좌부 전통에 의하면, “붓다 재세시 그의 가르침은 Buddha-vacana, Buddha-sāsana, Satthu-sāsana(스승의 가르침), Sāsana, Dhamma와 같이 여러 가지로 알려져 있었다.” (Walpola Rahula, 『One Vehicle for Peace』 참조) 이와 같이 ‘붓다와짜나’와 ‘붓다사사나’는 원래 같은 의미로 쓰였다. 상좌불교에서는 지금도 불교를 ‘붓다사사나’로 부르고 있다. ‘불설과 성교’를 구분한 자체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상좌불교에서는 팔리문헌을 정전(正典)과 비정전(非正典)으로 구분하고 있다. 정전(canon)은 붓다로부터 전승된 정법이라는 뜻이고, 비정전은 불제자들이 불설을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결집과 마찬가지로 정법을 고스란히 전승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교단사적으로는 파승(破僧, sanghabheda)의 정의가 잣대가 된다. 파승은 승단의 분열을 말한다. 붓다는 파승을 오역죄에 포함시켰다. 승단의 분열은 정법의 소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래의 상좌부를 제외한 다른 부파에서는 교리적 논쟁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분열의 명분 혹은 파승의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첫째와 둘째의 잣대는 불설/비불설 혹은 정법/비법에 관한 논쟁이었다면, 셋째의 파승은 전통/비전통의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단사적으로는 세 번째 잣대가 가장 중요하다.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部)’는 글자 그대로 ‘장로들의 정교(正敎)’라는 뜻이다. 즉 불멸 후 제1결집을 주도했던 500명의 장로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붓다의 적자’임을 자부하고, 2,500년 동안 단절 없이 전통을 계승해왔다. 그들은 파승으로 떨어져 나간 다른 부파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상좌부가 부파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좌부 장로들은 그러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전통을 고수했다. 역사적으로 상좌부의 계맥이 단절되었을 때, 다른 나라의 장로를 초빙하여 계단을 복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소승 논사들은 상좌부를 여러 부파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자기 부파나 대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을 계승한 쪽에서는 이에 대해 전혀 반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반론 자체가 없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전통을 고수한 원래의 상좌부만 살아남고, 다른 부파들은 모두 소멸되었다. 따라서 니까야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상좌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논자는 ‘아가마(Āgama, 阿含)’와 ‘니까야(Nikāya, 部)’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엄격히 말해서 ‘아가마’와 ‘니까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니까야는 상좌부에서 전승한 것이고, 아가마는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 전승한 것이다. 부파 간에 불설/비불설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가마와 니까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아가마와 니까야를 같은 분류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 자체가 상좌부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논자는 필자가 대승을 모른다고 혹평하고 있지만, 대승의 근원은 붓다에까지 소급된다. 붓다의 ‘전도선언’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라는 대목은 대승의 이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교단사적으로 말하는 대승교단(보살가나)는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불교였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부파교단 내에서의 불설/비불설의 논쟁과 부파교단과 보살가나와의 논쟁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현재의 조계종은 상좌부에, 군소종단은 부파교단, 전통과는 계통이 다른 원불교는 대승교단(보살가나)에 해당될 것이다.

끝 으로 논자가 반론문에서 지적했듯이 초기경전의 전승과정에 대해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의 성립 과정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논자는 그러한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가. 정말 납득하기 어렵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현존하는 니까야가 불설이 아니라고 단언적으로 선언한 학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논자 스스로 논리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

팔리문헌연구소장


1011호 [2009년 08월 21일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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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교수, “아함도 부파가 승인한 불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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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 한국불교사연구소 발행)에서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아함경과 니카야 또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본지 1009호 19면) 이에 권오민 교수가 다시 마성 스님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마성 스님이 논평에서 ‘충격적’이라고 하였듯이 필자 역시 그러하였으며, 문제의 논문(「佛說과 非佛說」,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도 ‘놀라운 일’임을 거듭 밝혔다. 그러니 초기불교 전공자나 테라와다 불교에 신념을 두고 있는 이라면 말해 무엇 할 것인가.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다는 말씀부터 올린다.

한정된 지면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마성 스님의 논평은 필자가 제시한 논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어야 함에도 다만 개론서에 나옴직한 상식과 정의(情意)에 기댄 것이어서 반론할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여겼지만, 논쟁을 ‘종파적 대결’로 몰아가는 점만은 묵과할 수 없어 반론의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는 처음부터 그것을 경계하였으며, 그래서 논문 서두에서 대·소승 제 학파의 학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오늘의 우리보다는 경전성립시기에 훨씬 가까웠을 시대(대략 2~6세기)의 문헌상의 증거로만 이야기하겠다고 하였다.

필자는 제 부파 사이의 비불설의 사례를 20가지 이상 들었다. “어떤 성문의 부파에서 전승한 경은 다만 성문이 설한 것일 뿐이다”는 『성실론』에서의 문제제기는 물론이고, 독자부(정량부를 포함하여)에서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무아에 관한 제경(예컨대 잡아함 제303경 등)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경량부가 눈 등의 5근과 색 등의 5경이 4대와 4대소조라고 설한 경(잡아함 제322경)을 유부에서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필자에게도 충격이었다. 더욱이 경량부는 경(經)을 지식의 표준(量)으로 삼는다고 표방한 부파였다.

그렇다고 필자는 승의의 자아(pudgala)를 인정하는 독자부와 정량부를 부법장(付法藏) 외도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또한 그것이 역사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정법이 아니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불교는 역사주의가 아니다. 유가행파(법상종)는 비록 역사상에서 사라졌지만 여래장이나 화엄을 통해 존속되고 있으며, 유부의 제법분별 또한 이후 불교교학의 토대가 되었다. ‘구사8년 유식3년’이란 말이 생겨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앞서 필자는 ‘불설/비불설’의 논쟁이 종파적 대결로 번지는 것을 경계한다고 하였는데, 마성 스님은 필자의 논문을 그렇게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하고 있다. 필자는 “유부의 학설이 정설인양 대변”한 적이 없으며,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논증을 끌어들여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한 적도 없다.

다만 어느 시기 『대반열반경』의 ‘4대교법’에 근거하여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이에 따를 경우 說者는 중요하지 않다)는 등의 4의설(依說)과 “경과 율에 나타나고 법성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불설이다”는 불설의 정의가 확립되었고(문헌상으로는 유부에 의해), 그것이 무착, 세친, 청변 등의 대승논사를 비롯한 하리발마, 중현 등의 소승논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용되었으며, 경전 또한 이에 기초하여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뿐이다.

또한 유부가 당시 분별설부로 알려져 있던 상좌부를 공격하던 내용을 ‘자세히’는 고사하고 한 번도 소개한 적이 없다. 아마 마성 스님은 상좌 슈리라타를 상좌부로 오인한 모양인데, 여기서 상좌는 『구사론』 상에서 ‘경량부’로 일컬어진 논사로서 세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자이다. 그리고 공격(비판)하였던 것은 상좌 슈리라타였지 유부가 아니었다.
주지하듯이 ‘아함’이나 ‘니카야’는 특정의 경명(經名)이 아니라 부파에 의해 결집 전승된 일군의 경전을 총칭하는 말로, 아함이 아함경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중국에 이르러서였다. 청변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전통’과 ‘진실’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 스님의 말대로 “상좌부 전통에서는 정법을 유지 전승하기 위해 결집했다.”

그렇다면 이 때 ‘정법’은 불교보편의 정법인가, 상좌부 전통에서의 정법인가. 스님은 계속하여 “이를 통해 비불교적 요소를 하나하나 배제시켜 나갔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상좌부 이외 부파,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 ‘법성(진실)’이나 ‘정리(正理)’라는 이름 하에 결집한 불설”은 비법(非法)이라는 말인가. 오늘날에 있어 이 같은 독선적 발언이 어떻게 가능한가. 묻고 싶다. 대저 아함과 니카야는 초기경전인가, 유부 혹은 상좌부 경전인가.

결코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마성 스님은 “아함이나 니카야도 개변 증광되었고 전승과정에서 불설이 아닌 내용도 많이 포함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비롯되었다’는 말과 ‘친설’은 분명 그 의미가 다르다. 필자는 논문에서 “대승경전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아함이나 니카야 또한 친설이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불설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제 논사들은 ‘불설(buddha vacana)’과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교(聖敎, buddha ´Sa-sana 즉 아함과 니카야)’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성교는 말하자면 불설의 정의에 따라 각 부파에 의해 불법(佛法)으로 승인된 불설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카야는 불타친설이라기 보다는 유부나 상좌부에 의해 불법으로서 취사선택되고 편찬 결집된 불설로서, 제 부파간의 불설/비불설의 논쟁 또한 이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마성 스님은 이러한 부파 간의 비불설 논쟁과 부파교단에서 비판한 대승 비불설론(실제 소승 논서에서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자의 단순비교는 큰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로서는 잘 납득되지 않는다. 추측컨대 스님은 개론서에서의 진술처럼 대승과 소승을 칼로 무 자르듯이 시기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혹은 교단 상으로 완전히 별개의 그룹으로 간주한 것 같다.

유부와 상좌부는 원래 동일계통이었기에 교학상의 크나큰 차이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부 계통이나 정량부는 이들과는 교학체계 자체가 다르며, 유부 계통으로 알려진 경량부조차 유부와는 전혀 다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당시 불교를 전공한다는 필자도 그들의 논서(예컨대 삼미저부론, 성실론)를 읽어내기 어렵다. 유부교설(우리가 익히 아는 ‘불교기초교리’는 대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들 부파의 학설은 비법인가. 그러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당시 대중부와 정량부는 상좌부 유부와 더불어 가장 볼륨이 컸던 불교교단이었으며, 정량부가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 역시 삼장을 갖고 있었지만(현장은 그것을 갖고 오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그들의 경전이 존재하였다면 대승경전에 대해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함에서 설한 18계의 ‘법계’와 여래장불교 계통의 ‘법계’는 그 자체만으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경량부(상좌 슈리라타)를 통하면 ‘전혀 다른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부에 의하는 한, 여래는 항상 선정에 머물기 때문에 일생토록 한 말씀도 한 적이 없지만 중생들이 설하였다고 여겨 환희용약하며, 보살은 중생의 요익을 위해 스스로 악취에 태어난다. 이러한 불타관과 보살관은 유부나 상좌부의 그것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해서 다만 현존의 아함경과 니카야에 근거하여 대승경전을 딴판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표를 던져 결정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나아가 세친도, 청변도, 중현도 제1결집은 모두 산실되었다고 전하며, 그 이후로도 무량의 경전이 은몰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이는 필경 ‘정법의 소멸’과 관계 있다) 제1결집 또한 순탄한 것만도 아니었다. 교범파제는 율장을 결집할만한 이로 추천되었지만 이를 거절하였고(『대지도론』), 흔히 설법제일로 알려진 부루나는 결집의 추인을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들은 것만을 전승하였으며(남전 율장 소품), 가섭 주도의 결집과는 별도로 대결집이 단행되기도 하였다.(『대당서역기』)

사 실 제1결집에서 송출된 법 즉 경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카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문자로 작성되기(기원전 1세기 무렵?)까지 30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 그 때는 이미 대승경전도 편찬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온갖 한계를 간과한 채 다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불교를 주어진 대로 해석하는 것은 불교학자의 소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정의(情意)와 신념에 의탁하여 당시 논사들의 증언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1010호 [2009년 08월 17일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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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 스님, 권오민 교수 “아함도 비불설” 주장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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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 한국불교사연구소 발행)에서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아함경과 니카야 또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권오민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최근 경상대 권오민 교수는 「문학/사학/철학」 제17호에 ‘불설과 비불설’이라는 논문에서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비불설이다”(p.179)라는 핵폭탄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방대한 분량의 논문을 단 몇 문장으로 논평한다는 자체가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워낙 충격적인 주장이기에 우선 몇 가지 문제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현존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전승되는 과정에서 개변(改變)·증광(增廣)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아함이나 니까야 속에는 전승과정에서 불설이 아닌 내용도 많이 포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함이나 니까야가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아함이나 니까야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논자는 불설과 비불설의 논쟁은 부파불교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불설/비불설 논쟁은 맹목의 논쟁일 뿐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 비교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각 부파 간에 있었던 불설/비불설 논쟁은 붓다의 법과 율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생긴 논쟁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찬술한 대승경전을 부파교단에서 비불설이라고 비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불멸후 승단이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붓다의 법과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파들 간에는 끊임없이 불설과 비불설의 논쟁이 있었다. 논자는 설일체유부(이하 유부로 약칭함)가 당시 분별설부로 알려져 있던 상좌부를 공격하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유부와 상좌부는 상반되는 교리가 많았기 때문에 논쟁이 치열했다. 현존하는 유부의 논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상좌부의 니까야나 아비담마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찾아보기 어렵다.

원래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는 자기가 진짜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이러한 사례는 대승경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대승경전에서는 부파교단의 가르침을 ‘비구의 복색을 한 악마’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상좌부의 삼장에는 이에 대한 반응이 전혀 없다. 전통을 계승한 쪽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상좌부 전통에서는 정법을 유지 전승하기 위해 결집을 통해 비불교적 요소를 하나하나 배제시켜 나갔다.

그런데 자기 부파가 전통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설과 비불설을 구분하는 잣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반열반경』에 언급된 ‘사대교법(四大敎法)’에는 그 기준을 ‘법과 율에 합치하느냐?’로 판가름했다. 그러나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는 거기에 ‘법성(法性, dharmata-)’ 혹은 정리(正理, 올바른 이치)를 삽입함으로써 자기 부파의 설이 불설임을 증명해 나갔다. 특히 논자는 유부의 설이 정설인양 대변하고 있지만, 결국 유부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논자는 결론적으로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파불교 시대에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대승경전도 그런 측면에서 보면 불설이라고 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유부의 전통을 계승한 비바사사(毘婆娑師)의 논증을 끌어들여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불설로 가탁한 것이다.

대 승경전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이 아님은 명명백백하다. 다만 대승경전에 서술된 내용이 초기 붓다의 가르침과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깨달은 자’ 즉 제불(諸佛)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 즉 불교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아함이나 니까야도 변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다.
 
마성 스님(팔리문헌연구소장)


1009호 [2009년 08월 10일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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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경상대 교수,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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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함경과 니카야를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경전으로 간주하거나 이들 경전을 근거로 초기불교로 돌아가자는 얘기들이 공공연히 나오는 가운데 아함경과 니카야도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역사적 ‘진실’이 아니라는 지적도 함께 제기됐다.

부파불교 전공자인 권오민 경상대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 게재된‘불설(佛說)과비불설(非佛說)’이란 논문에서 ‘비불설 논쟁’이 대승과 소승 사이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논쟁이 결코 아니라 각 부파 간에 빈번하게 다뤄졌던 일반적인 논쟁이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규명했다. 특히 오늘날 붓다의 친설로 여겨지는 한역 아함경과 남방불교의 니카야도 당시 설일체유부 상좌부 등 각 부파의 교학적 견해에 따라 취사선택되고 때론 불설의 내용까지 바꾸면서까지 새롭게 편찬한 경전들로 대승경전의 편찬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조목조목 밝혔다.

이 논문에 따르면 부파불교 시대에도 불설의 진위 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에 포함되고 율에 나타나면 불설이다”라는『대반열반경』의 정의에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라는 이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불타가 설한 것이든 제자가 설한 것이든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로 수지할 수 있다”(『대비바사론』) “ 불법은 오로지 불타의 입으로 설해진 것만이 아니라 일체 세간의 진실하고 좋은 말은 다 불법이다.”(『대지도론』『성실론』)라는 견해가 불설을 판정하는 교파 간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 부파의 불설론이 경전 편찬의 이론적 근거가 됐던 까닭에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아함경과 니카야를 곧이곧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과 니카야 또한 비불설이며 대승경전이 대승론자에 의해 찬술 결집된 것이라면 아함경과 니카야 역시 부파의 논사들에 의해취사 선택되고 찬술 결집된 경전들로 그 당시조차 비불설로 비판 받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구의 복색을 한 마구니 설’이라고까지 아비달마불교를 비난했던 대승의 찬술자들도 아비달마의 불설론 전통을 ‘계승’해 경전을 편찬하고 당위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권 교수는 소승이나 대승 등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오늘날의 비불설 논쟁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논쟁은 구호나 선전에 근거한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것일뿐더러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으로 ‘맹목의 논쟁’일 따름이다. 불설과 비불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열려 있었으며 진실(법성)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진실에 의지하라는 것이 대소승의 공통된 불설관이었다”며 “요즘 일각에서 아함경이나 니카야만을 올바른 붓다의 가르침으로 주장하거나 거꾸로 아함경이 나니카야를 초심자를 위한 경전쯤으로 얕잡아 보는 것은 큰 문제”라고지적했다. 특히 권 교수는 “오늘 우리가 시비 결택해야 할것은 종파에 따른 혹은 역사와 전통에 따른 불설·비불설이 아니라 ‘진실’ 바로 그것”이라며 “대승이 그러했듯 이제 바야흐로 오늘의 진실을 오늘의 언어형식으로 결집하고 그것의 불설과 비불설을 시비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형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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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달라이 라마인가 / 탁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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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미국과 유럽에서 달라이 라마가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꼽혔다는 기사가 2008년 12월 1일 세계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미국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과 프랑스 뉴스 전문 채널 ‘프랑스 24’가 여론조사 기관인 ‘해리스 인터렉티브’에 의뢰해 진행한 이 여론조사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과 미국 등 6개국 1,000명의 성년을 대상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유럽과 미국 등 6개국 전체에서 달라이 라마가 단연 1위였으며, 2위는 미국의 경우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유럽은 메르켈 독일 총리가 차지했다.

달라이 라마는 6개국에서 고른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 시민들의 호감도는 무려 8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 결과는 사실 그리 놀라운 뉴스는 아니다. 2007년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달라이 라마는 독일 출신의 교황 베네딕토를 누르고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꼽혔으며, 기타 여러 설문 조사에서도 세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랭킹에서 달라이 라마는 빠지는 법이 없다.

최근 서구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다. 서구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불교 중에는 흑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일본불교도 있고, 불광산사로 대표되는 대만불교도 있으며, 위빠사나라는 체계적 수행 체계를 갖춘 미얀마·스리랑카의 상좌부권 불교도 있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티베트불교의 영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인구를 모두 합쳐도 600만에 불과한 티베트인들이 불교를 대표하는 리더그룹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 이유 중 8할은 사실상 달라이 라마라는 개인의 인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유럽 등지에서 열리는 달라이 라마 강연회는 연일 매진이며, 달라이 라마가 대중 연설을 할 때면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수만 인파로 가득 메워진다. 그를 직접 면담한 불교학자, 과학자, 심리학자, 의사, 기자, 심지어 할리우드 톱스타들까지 그의 이야기를 활자화하는 데 열심이다. 이만하면 살아 있는 한 개인으로서 그보다 더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유명 인사는 없는 듯하다.

달라이 라마, 2,500년 세계불교사에서 비주류인 티베트 겔룩파의 수장이자 나라조차 없는 난민정부의 대표에게 왜 세계인들은 열광하는 것일까.

달라이 라마가 세계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부터였다. 노벨평화상 기념 연설에서 그는 티베트의 현실을 알리는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 책임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세계인들은 티베트가 예전에는 중국과는 별개의 독립국가였으며, 아직도 티베트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됐다.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티베트가 불교라는 종교를 매개로 1,000여 년간 종교 중심의 공동체를 유지했으며, 현재 또한 불교적 교리에 근거해 비폭력 노선을 수십 년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후 세계 언론은 달라이 라마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상당한 양의 지면을 할애해 오고 있다. 그로 인해 티베트의 정치적 문제는 물론 그들의 신앙까지 매스컴에 소개되고, 덩달아 불교에 대한 서구인들의 관심 또한 증폭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시작된 달라이 라마 열풍은 서구에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으로도 역수입됐다. 한국에서 달라이 라마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서구보다 약 10여 년 뒤인 1990년대 중후반부터였다. 달라이 라마에 대한 뉴스가 일간지에 오르내리고, 불교를 전공하는 소장학자들이 달라이 라마의 저서를 연달아 번역하면서 그는 더 이상 히말라야에서 쫓겨난 난민들의 수장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자신의 조국을 잃어버린 채 50년간 망명 생활을 해 온 한 불교 지도자의 이 같은 인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일부에서는 그것이 서구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되었다고, 혹은 티베트불교의 신비주의의 영향이거나 매스컴이 만들어 낸 현대판 신화라고 폄하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서구 열강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정치적 의도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가히 ‘달라이 라마 신드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열광의 원인과 이유를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세계에서 대승불교의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티베트와 한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나라 잃은 망명정부의 불교가 세계인들의 환호를 얻고 있는 반면 한국불교는 여전히 반도 속에 갇혀 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많은 이들이 티베트불교에서 인류의 미래를 갈망하는 반면 한국불교에서는 암울한 내일을 예측하고 있다는 점이다.

티베트불교의 밝은 빛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불교의 그림자가 보인다. 이 글의 목적은 바로 그 빛과 그림자를 조명하는 데 있다.

티베트의 깊은 불심

티베트 하면 떠오르는 장면 중의 하나는 설산을 넘어 포탈라궁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티베트 불자들의 모습이다.

동상으로 손이 부르트고 얼굴이 꽁꽁 얼어붙다 못해 실핏줄이 터져 나와도 그들은 수개월, 심지어 수년간의 긴 여정을 기쁜 마음으로 걸어간다. 이생은 다음 생을 향해 가는 잠시 동안의 과정일 뿐, 아주 먼 생에 다가올 성불을 위해 그들은 오늘의 고통쯤은 참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같은 신심은 티베트불교의 우수한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달라이 라마라는 인물은 우연히 만들어진, 혹은 중국 침공이라는 외부의 핍박에 의해 다듬어진 인물만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티베트불교의 강점은 ‘두터운 신심’과 ‘체계적인 불교 교리’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는 불교 교리에 대해 모르는 이에게는 아주 쉽고 단순하지만, 불교 교리를 잘 아는 이에게는 아주 난해하고 고차원적인 불교이다. 얼핏 보기에는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티베트불교가 문자를 모르는 사람부터 최고 수승한 경지의 수행자들에게까지 모두 적용될 만큼 폭넓은 수행 체계와 교리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티베트불교에서는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마니차, 마니주 같은 수행 도구를 만들었다. 경전이 빽빽하게 새겨진 회전대를 돌리기만 해도 그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다는 그 수행 도구는 경전을 읽을 수 없는 이들에게 보살도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과 신심을 키워 준다.

‘옴마니반메훔’으로 대표되는 주력 수행, 설산을 넘으며 수천 리를 오체투지를 하는 절 수행, 경전을 읽는 간경, 비밀스러운 탄트라 수행 등이 티베트불교에는 함께 공존한다.

단순히 공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철저하게 교리로 연결된다. 한국에서는 여러 종류의 수행들이 각각의 영역에 별개로 행해지는 것과 달리 티베트불교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한 수행자가 모두 거쳐야 할 수행의 일부들이다.

이 같은 수행의 체계화는 티베트 수행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람림첸모》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람림첸모》는 겔룩파의 창시자 총카파가 불교 입교에서부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실천 방법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총카파는 이 책에서 붓다의 모순적인 가르침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수행 단계의 적당한 지점에 장소를 얻어 적절히 배치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람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 먼저 불도 수행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준비와 불도 수행을 시작하기 위한 동기를 설명한다. 그다음에는 불교의 실천적 이론적인 가르침을 하급·중급·상급 세 등급의 사람을 모델로 하여 설명해 간다.

준비 단계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 주는 스승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일러 주며, 불도 수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을 귀중히 여기고, 불도 수행에 힘써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현실 세계나 윤회 세계의 본질이 고통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불도 수행에 뜻을 두기 위한 동기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하여 불교 신앙에 들어설 준비를 마친 뒤에는 불교의 다양한 설법을 각 개인의 자질이나 불도 수행의 목표에 부합하도록 순서를 정하여 상세히 설명해 간다.

제일 하급의 사람은 아직 불도 수행 자체에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적어도 내세에 불도 수행이 가능한 신세로 태어나기 위한 도덕적 덕목을 실천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중급의 사람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만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이며, 상급의 사람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결심한 자이다.1)

수행자는 우선 현교의 수행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이를 마스터한 사람만이 밀교의 수행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대승의 방편들을 고도로 정교하게 체계화시킨 것이 금강승, 바로 밀교 수행이다.

티베트불교는 언제나 소승과 대승, 금강승 세 가지를 아우르는 수행 전통을 이어 왔다. 즉 수행자 개인의 생활양식은 소승의 관점에 두고, 깨달음을 향한 의식은 이타행의 대승적 관점에 두며, 깊고 심오한 내면의 깨달음은 지혜와 방편이 합일된 금강승의 길에 의지해 왔다.

티베트불교에서 꿈꾸는 완전한 수행자의 모습은 바로 이 세 가지의 길을 함께 가는 것이다.2)
티베트불교는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마교로 불리어왔다. 라마교라는 호칭 속에는 중국―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 대승불교와는 달리 ‘라마’를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불교를 지칭하는 동시에 성적(性的) 탄트리즘이 내포된 변질된 의미까지 포함돼 있다.

이 같은 오해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지금도 역사학계에서는 고려시대 라마교의 유입으로 고려불교가 퇴폐적으로 변질됐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할 정도 티베트불교에 대한 한국 학계의 인식은 매우 낮다.

하지만 중관사상을 전공하는 불교학자들은 “티베트불교만큼 지적이고 정통적인 불교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라고 힘주어 말한다.3) 인도 대승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티베트불교는 중관사상을 체계화시켜 고도의 수행 체계를 완성시켰고, 현재까지 그 전통을 가장 잘 보전하고 있는 곳은 티베트라는 것이다.

폭넓은 교리 체계가 만들어 낸 포용력

티베트불교의 강점은 문자를 모르는 이부터 최고 단계의 수행자에 이르기까지, 만트라부터 탄트라까지 포함하는 수행 단계를 체계화시켜 하나의 체계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한 데 있다.

티베트불교의 폭넓은 교리 체계는 불교의 여러 종파를 넘어 다른 종교까지 포함할 수 있는 포용력을 만들어 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달라이 라마의 법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는 2003년 12월부터 2004년 1월에 걸쳐 다람살라를 방문한 한국인들을 위해 설법한 《입보리행론》 법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부처님께서 법의 넓이와 깊이를 달리해 설하신 것은 중생의 성향과 기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중생 각자의 근기에 따라 도움이 되고, 각 중생에게 가장 적절한 법을 설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 모두 존경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끔 우리도 이런 짓을 합니다. 대승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소승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다소 얕잡아 봅니다. 소승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대승법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같은 대승법 안에서도 ‘밀교는 법이 아니다.’라고도 합니다. 한편 밀교 수행을 특별하게 여겨 육바라밀 수행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각자의 성향이 다르고 근기가 다름을 알아 다양한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합니다.4)

달 라이 라마는 불교 수행자임에도 ‘불교가 최고의 종교’라는 말을 극도로 피한다. 이는 다른 문화와 종교적 토양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티베트불교’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를 설파하기 위한 달라이 라마 특유의 화법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포용적 태도는 오히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로 하여금 불교에 관심을 갖고 불교에 귀의하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의 붐, 달라이 라마 신드롬이라는 현상을 통해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의 강점은 바로 한국불교의 약점이기도 하다. 한국불교는 전통적으로 모든 종류의 수행법을 포용하는 통불교의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근현대에 들어서 간화선만을 중시하는 수행 풍토로 변화됐다. 간화선 수행법은 체계적인 교학 체계 속에서 배울 수 있는 혹은 검증받을 수 있는 수행법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은 스승에 의해서만 점검받을 수 있고, 100만 혹은 1,000만의 수행자 중에서 그 경지를 체득한 사람이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고도의 수행법이다.

만일 그의 수행 경지를 점검해 줄 스승이 없다면 그 법 또한 끊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로또에 가까운 확률을 가진 수행 체계 속에서는 낙오자 역시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을 지닌 간화선을 한국불교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으로 인정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중심주의는 다른 수행법들은 저차원의 수행법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낳았다.

간화선과 소수 정예 수행자를 중심으로 하는 수행 문화는 한국불교 내에서 여러 가지 병폐를 낳았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 불자들로 하여금 불교를 막연하고 피상적인 대상으로 여기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시스템이 만들어 낸 인물, 달라이 라마

티베트불교에서는 언제라도 달라이 라마를 또다시 배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티베트 시골 마을의 가난한 집 아이 하나를 데려다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을 붙이고 승려 교육을 하면 된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티베트불교가 갖고 있는 교육 시스템 안에서는 달라이 라마라는 지도자를 통해 티베트불교의 가르침이 언제까지라도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달라이 라마는 어린 시절 전생부터 스승이었던 린포체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린포체들이 그를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지목했듯이, 린포체가 입적한 후에는 달라이 라마가 파견한 고승들이 린포체의 환생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훌륭한 린포체로 장성할 때까지 달라이 라마의 특별 관리 속에서 린포체로서 고된 교육을 받는다. 이는 티베트 불교를 이어 가는 방식이자 후에 환생할 달라이 라마에게 올바른 법을 전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을 수차례 방문해 지금은 꽤 유명 인사가 된 링 린포체의 경우 현재 달라이 라마에게서 특별 교육을 받고 있는 린포체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생에서는 자신이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고, 현재는 달라이 라마가 자신의 스승이며, 수십 년 뒤에는 제18대 달라이 라마로 지목되는 소년을 가르치게 될 의무를 안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남인도의 드레풍 사원에서 수학하고 있는 링 린포체를 수시로 다람살라로 불러 자신이 직접 경전을 강의하는 대부분의 법회에 참석게 한다. 그리고 때때로 법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공부를 점검해 오고 있다.

티베트의 독특한 환생 제도는 인물과 인물의 교차를 넘어 교학과 교학이 계승되는 역할을 담당한다. 달라이 라마 또한 자신이 제1대부터 13대까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달라이 라마의 언행을 잘 따라가다 보면 해를 거듭할수록 스스로 전대의 달라이 라마의 전생으로서, 혹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긍지를 갖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달라이 라마가 ‘달라이 라마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달라이 라마가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5)

달라이 라마는 그의 자서전 등을 통해 5대나 13대 달라이 라마와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토로하곤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티베트의 환생 제도는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지는 윤회 관계라기보다는 법에서 법으로 전해지는 윤회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3보다 더 강도 높은 교육

티베트 승원의 스님들은 한국의 고3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게쉐라는 최고 학위를 받을 때까지 약 20년이 걸리는데, 이때까지 하루에 평균 20시간 정도 교학 공부를 해야 한다. 이 같은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 것은 달라이 라마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사미가 되기 전 행자 시절에는 상용 근행집을 암기해야 하고, 사미가 되면 전통적인 교육 프로그램에 의한 불교 교리 학습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뻬체 게겐’을 따르게 된다. 승려에게 있어서 ‘뻬체 게겐’이라는 것은 석존이 설파한 말을 구전으로 가르쳐 그 법맥을 직접 전해 주는 스승이다. 티베트불교에서 스승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티베트불교가 라마불교라고 지칭되는 진짜 이유는 바로 라마가 법을 전승해 주는 특별하고도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비 승려는 우선 불교의 기초적인 교의를 배우기 위한 수업에 들어가 문답 방법을 학습한 후 불경 강독 수업을 받게 된다. 스승은 우선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불경을 낭독하여 제자에게 들려주고 그 의미를 문답 형식으로 해설한다. 제자는 수업 전후에 전수받을 불경 텍스트를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어야 하며, 암송할 뿐만 아니라 동급생과 문답을 하고 불경이 의미하는 내용을 모든 각도에서 이해하여 자신의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암기와 문답에 의한 학습법이 티베트불교 학습법의 핵심이다.

티베트 승가 교육의 백미는 ‘딱셀’이라는 토론법이다. 티베트 사원에 가면 마당에서 붉은 승복을 입은 스님들끼리 손바닥을 딱딱 치며 요란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딱셀이다. 두 토론자가 차례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데, 질문을 제기할 때는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후 앞으로 뻗친 왼손에 내려쳐 손뼉을 치고 동시에 왼쪽 발로 땅을 구른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손뼉 소리와 함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한다. 답변자는 질문자가 구성한 명제에 대해 그렇다, 왜 그런가, 논거가 성립하지 않는다, 필연 관계가 없다 등 네 가지 답변 중 하나만 대답할 수 있다.

이러한 합리적인 교리문답을 통해 어떤 질문에서도 거침없이 답변할 수 있는 논리 체계를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강원의 스님들은 대중 앞에서 보름에 걸쳐 시험을 본다. 한 사람당 3명에서 10명씩 돌아가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데 거의 무의식 중에 대답을 해야 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강원에서 소승불교의 수행법과 대승불교의 교학 및 논리 체계를 이수한 사람만이 비로소 다음 단계인 밀교 수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

티베트불교의 강점을 단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수천 리를 오체투지 하면서 나갈 수 있는 신심을 바탕으로 성립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불교 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에 관한 책 중에서도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은 하워드 커틀러라는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와 달라이 라마의 수개월간 대화를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과학, 사랑, 욕망,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모두 담겨 있다.

하워드 커틀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지고, 달라이 라마는 모든 질문에 답변을 한다. 어떤 질문에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논리를 불교적으로 풀어내는 훈련은 달라이 라마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모든 스님들이 거쳐야 하는 교육 과정의 일부이다.

이 같은 모습은 한국 승가에서 경전을 경시하는 풍조와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한국의 선방에는 불립문자라 하여 문자를 경시하고 대신 화두 참구만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근현대 고승 중에는 아예 제자에게 글을 익히지 못하게 하고 무조건 화두 참선만을 하라고 한 경우도 있었으니 이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인가.

평생토록 화두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중생들에게 자신이 깨우친 법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더구나 불교에는 무지하지만 세속의 지식은 차고 넘치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고난으로 가득한 독특한 인생 이력

현재의 달라이 라마는 역대 달라이 라마 중 ‘가장 복이 없는 라마’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고난으로 가득한 인생을 보냈다.

후일 달라이 라마 14세로 지명되는 텐진 갸초는 1935년 7월 6일 티베트의 탁최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생후 2년 만에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지목된다. 네 살때부터 포탈라궁으로 간 그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예비 지도자로서 교육을 받았다. 이때까지 티베트의 통치는 그의 섭정인 레팅 린포체가 맡았다.

하지만 그가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인 1951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로 침입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의 삶은 매 순간 난해한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중국 공산당이 처음 티베트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달라이 라마는 공산주의의 이상과 불교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이라는 욕망을 버리고 공동체의 삶, 인류의 공존을 추구하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공산당 수뇌부와 만난 그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불교의 정신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1959년 라싸에서 민중 봉기가 발발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달라이 라마는 결국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한다. 그리고 당시 수상이었던 네루의 도움을 받아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 지역에 티베트 난민정부를 수립한다.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난민들의 정착을 돕는 한편 티베트 승가를 복원하는 일을 전개한다. 나라는 없더라도 불법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다람살라를 비롯해 인도 각지에 티베트 사원을 건립하는 한편 티베트의 지도자로서 독립을 위한 ‘독특한’ 행보를 전개한다. 나라를 잃은 망명 정치가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열강의 도움을 받아 무장 세력을 조직하는 대신 달라이 라마는 인류애에 호소하는 비폭력 노선을 전개했다. 폭력은 폭력을, 복수는 복수를 불러올 뿐이라 판단한 달라이 라마는 그를 따르는 600만의 티베트인에게 “중국을 용서하라.”라고 설파하며, 무기를 드는 대신 세계 곳곳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파하라고 당부했다.

자신 또한 세계 곳곳으로 대중 강연을 떠났고, 세계인들을 그의 친구, 그의 제자, 그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평생토록 고난에 찬, 하지만 늘 희망에 찬 달라이 라마의 인생 역정은 자신의 삶을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오히려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 노선을 주창하며, 중국인을 사랑하라고 역설해 왔다. 종교인으로서 지극히 종교적인 삶의 모범을 보여 주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는 1989년 이 시대의 스승들에게 수여하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동정심이 더 큰 동정심을 만들다

달라이 라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당시 누군가 성금을 어디에 쓰겠느냐고 질문을 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은 가난합니다. 난민입니다. 하지만 굶주려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배고픈 자들을 돕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에 보내 배고픈 사람들이 허기라도 면할 수 있게 할 생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의 노벨상 상금 중 상당 부분은 나병환자 치료에 쓰라며 테레사 수녀에게 보내졌고, 또 일부는 아프리카 기아들에게 보내졌고, 아주 작은 일부만이 망명정부에 지급됐다. 그나마도 주위 사람들이 티베트를 위해서도 그 돈을 써야 한다고 수차례 설득을 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이 사례는 달라이 라마가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동정심’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만약 달라이 라마가 세계에서 가장 핍박받는 민족의 지도자에 불과했다면, 혹은 그가 독립국가 티베트의 수장으로 존재했다면 그는 오늘날과 같은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인간을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준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삶의 표본이다. 그가 보여 준 티베트에 대한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한없는 연민은 그의 추종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벨평화상은 그 효과가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분기점이었다.

달라이 라마의 이 같은 면모에 대해 대중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잘 간파하는 ‘아주 머리 좋은 스타’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친구 혹은 추종자들은 그의 동정심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는다. 불자들은 그 마음을 ‘지혜 바라밀’이라고 여긴다.

달라이 라마와 가장 큰 공감대를 형성한 민족은 아무래도 (달라이 라마를 보기만 해도 눈물을 줄줄 흘리는 티베트인들을 제외하고) 유대인들이 아닐까 싶다. 달라이 라마의 영적 메시지에 끌려 불교로 개종한 서양인들 중에는 유대인이 유난히 많다. 불교 개종 유대인들을 서양에서는 주부(Ju-Bu, Jewish buddhist의 준말)라고 부른다. 《연꽃 속의 유대인》의 저자 로저 캐머네츠는 유대계 미국인의 최소 6%에서 30%가 불교 단체 활동을 한다는 설문 결과를 밝혔다.

이스라엘―티베트연구소 공동 창립자 하임 페리 박사에 따르면 최근 이스라엘 젊은이들에게는 군대 제대 후 다람살라를 순례하는 것이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또 영성을 찾아 혹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다람살라를 방문하는 이스라엘 국민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예수도 부정한 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나라도 없이 민족을 유지해 온 유대인이라고 생각해 온 관점에서 본다면 놀랄 만한 이야기이지만 정작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열광하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임 페리 박사는 “우리는 침략당하고 박해받은 민족들이라는 면에서 하나의 공동체이니까요. 고난을 함께한 사람들은 뭉치는 법 아니겠어요?”라고 설명했다.

로널드 B. 소벨 박사는 “달라이 라마 추종자로 일컬어지는 유대계 미국인 30% 대부분은 본능적인 연민에 의해 움직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선조의 망명 역사를 그리 완전히 알지 못하는 유대계 미국인들조차도 연민에 이끌렸을 것입니다. 피, 문화적·역사적 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일종의 동질성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설명한다.6)

유대인 학자들은 달라이 라마에게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에 그에게 열광한다고 분석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이유에 불과하다. 많은 이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느끼는 공감대는 본능적 연민, 그리고 위로이다.

만일 티베트가 중국 침입을 받지 않았고, 부탄처럼 독립된 국가로 남아 있었다면 어쩌면 오늘의 달라이 라마는 없을지도 모른다. 나라를 잃어버린 망명정부의 수장으로, 인구의 6분의 1을 중국인들의 참혹한 살상으로 잃어버린 정치 지도자로서, 1,300여 년간 이어져 온 승가의 대표자로서 그는 항상 고뇌하고 아파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왔고, 그는 그때마다 가장 불교적인 행동을 스스로 실천해 왔다.

그의 고통, 그가 보여 준 지혜로운 선택, 고통으로 단련된 고매한 인품은 직간접적으로 많은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람을 잘 이해하는 사람: 대중적 흡인력

달라이 라마에게는 분명 대중들을 끄는 ‘힘’이 있다. 그를 만나는 순간 특별한 무언가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아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다.

뉴욕 티베트오피스 대표 애니 워너는 “그를 만나고도 감정이 격해지지 않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짓거나 울음을 터뜨리거나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하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인으로서, 그리고 대중적 스타로서의 요건을 아주 많이 갖추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중에 대한 흡인력’이다.

달라이 라마를 직접 만난 이들이 이야기하는 달라이 라마의 힘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는 사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상당히 복잡한 지적 토론을 벌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선의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사람을 가려 가며 대화하지 않는다. 어떤 이름표를 달고 다니든,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든, 재산이 얼마든 상관 않고 모두와 이야기한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 대화하든 간에 자신과 상대가 똑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몇 년에 걸쳐 알면서 느낀 점은 식당 웨이터를 대할 때에도 대통령이나 수상을 대할 때와 똑같은 존경심과 친절함을 보인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저자 하워드 커틀러

내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사람들은 진작 밖으로 나가 버렸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13차원을 넘나들며 요란하게 하는 연설이 아니면 먹혀들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얼마나 단순한지, 영성학 개론 첫 수업에 와 있는 줄 착각할 정도다. 하지만 30분 정도 듣다 보면 정말로 난해한 주제를 줄이고 또 줄여서 간결하고 정제돼 명료한 윤리 강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 말에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련되고 싶은 욕망을 벗어 던지고 그의 여행길에 함께 오른다.

―캘리포니아 감독교단 윌리엄 E. 스윙 주교

지적 웅대함, 학식의 깊이, 이해의 너비로 혼까지 빼어놓을 만한 위대한 자료들은 세계 도처의 도서관에 깔렸습니다. 하지만 혼을 빼놓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싶어 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근본적인 선으로써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방식으로 그들 의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깊이요? 사랑과 자비. 그가 이 성전에서 연설했을 때 주제가 21세기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기초적인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본적이고 단순한 주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일상과 사회의 한 귀퉁이에 밀어넣은 채 잊고 사는 그 기본적이고 단순한 주제를 1차, 2차, 3차 들으면서 계속해서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7)

―뉴욕 에마뉴엘 유대교 성전의 랍비 로널드 B. 소벨 박사

성하는 제대로 숙달된 거인이기 때문에 정말로 어려운 것들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배우 리처드 기어

윌 리엄 주교의 말대로 달라이 라마는 대부분의 법문에서 약간은 지루한 목소리로 아주 쉬운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하지만 그의 법문을 자세히 들어 보면 아주 쉬운 언어 속에 화엄, 중관, 유식, 밀교를 아우르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펼친다. 수십 년간 승려로서 습득한 불교학적 지식은 서양의 철학이나 과학기술, 그리고 다른 전통을 지닌 사람들과 만나도 충돌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문화적 전통과 지식을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서양인들에게 생소한 불교를 ‘티베트’라는 요소를 통해 연결시키듯이 말이다.

그의 지식이 다른 문화와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달라이 라마 개인이 아주 깊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측면이기도 하다. 달라이 라마에게는 서양인 친구들이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과학자, 의학자, 심리학자들은 매년 세계 각지에서 ‘마음과 생명 심포지엄’을 열고 30년째 달라이 라마와 마음에 관한 토론을 전개해 오고 있다. 이는 달라이 라마가 불교적 교리를 넘어 인간에 관한 여러 정보와 지식에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달라이 라마의 깊이는 물론 티베트 승가에서 받은 훈련에서 비롯된다. 달라이 라마는 아비달마, 프라즈나파라미타, 마드야미카, 비나야, 프라마나 등 기본적인 불교 철학 외에도, 시, 음악과 연극, 천문학, 율문과 문장, 의학 등 전공 과목과 부전공 과목을 어린 시절부터 이수했다.8)

하지만 여기서 달라이 라마 개인의 노력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스스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어린 시절 포탈라궁에서 시계, 자동차 등 자신이 지닌 얼마 안 되는 기계를 모두 해부해 볼 정도로 그는 서양 기계문명에 관심이 많았다.

장성한 이후에도 그 호기심은 계속 이어져 최근에는 뇌 연구를 하는 서구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스스로 뇌파 연구의 실험 대상이 돼 줄 정도로 과학기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화와 역사, 심리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데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 같은 박학다식이 달라이 라마로 하여금 다양한 전통을 가진 수많은 이들에게 대기설법을 하는 데 풍부한 토양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자비로운 미소를 지닌 친절한 친구

그 분을 직접 뵙고 당신께서 가르치시는 그대로 수행하고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본 바로는 성하는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끊임없이 자비로 대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말로 어려울 것 같은 상황에서도요. 수년 동안 티베트인들에게 티베트어로 말씀하시는 자리에 갔는데 처음 참석할 때부터 성하는 한 번도 빠짐없이 “중국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우리의 조국을 파괴했을지라도 그들이 우리를 고문했지라도 그들을 미워하지는 마십시오. 폭력도 행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의 젊은 세대 중 다수가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성하는 계속해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십니다.9)

유대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유대인 승려 툽텐 최된 스님의 이야기는 왜 서구인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열광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언행일치의 삶, 원수마저도 끌어안는 자비심,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 이 같은 요소들이 달라이 라마를 존경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달라이 라마를 직접 만난 사람들은 이 외에도 또 한 가지를 꼽는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가) 한 개인을 우주 전체와 같이 대한다.”라고 설명한다.

한국에서 티베트불교를 전공한 최초의 불교학자로 꼽을 수 있는 주민황 박사는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눈빛, 타인에 대한 그의 태도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주민황 박사가 처음으로 친견한 자리에서 한국에서 온 불교학자라고 소개하자 달라이 라마는 “나는 한국과 티베트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나라라고 확신한다.”라고 깊은 호감을 표시하며 “티베트의 이야기를 한국에 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너무도 자애롭고 친절한 눈빛으로 성하는 저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하셨어요. 누구를 만나든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그 사람에게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십니다. 저는 지금도 그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번역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민황 박사처럼 달라이 라마와의 특별한 만남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실 한둘이 아니다. 미국계 유대인이자 서양불교스승네트워크의 창립자인 수랴 다스 라마는 “그분께 느끼던 유대감은 정말 깊었습니다. 제게 정말 많은 관심을 보이던 분이었고요. 함께 있을 때만큼은 세상 그 무엇도 저보다 중요하지 않은 듯한 굉장한 느낌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비록 한순간이라 해도, 다른 중요한 일이 많다고 해도 말입니다.”10)라고 말한다.

전 캔터베리 대주교 조지 캐리 경은 “전 인류를 끌어안는 따뜻함이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 중에서도 달라이 라마를 단연 돋보이게 하는 가치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지도자로서 그를 여러 차례 만난 사람으로서 그의 놀라운 구도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라고 격찬했다.

톰 랜토스 미 하원 외교위원장의 부인이자 ‘강아지를 안고 다니는 인권할머니’로 유명한 아네트 랜토스는 “악수를 청하고 묵례를 합니다. 그가 시선을 맞출 때에는 마치 영혼의 저 뒤편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라고 달라이 라마를 설명한다.

달라이 라마가 가진 또 한 가지 장점은 그가 상당히 유머러스하다는 것이다. 기념사진을 찍을 때 일부러 옆구리를 쿡 찔러 친구를 웃긴다든지, 법문을 할 때 농담을 던져 청중을 깜짝 놀라게 한다든지 하는 일화들은 매우 유명하다.

그런 달라이 라마의 모습에 서양인들은 “교황에게서는 수천 년간 볼 수 없었던 친근한 모습”이라며 열광한다.

달라이 라마는 “나의 종교는 단순합니다. 나의 종교는 친절입니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다. 그런 사람이 사랑받는 일은 사실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인류의 스승: 보편적 책임감

달라이 라마는 자주 대중 강연을 한다. 외국에서 대중 강연을 할 때면 그의 이야기는 주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보편적 책임감, 두 번째는 종교들 간의 조화, 세 번째는 티베트 문제이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적인 조화와 보편적 책임감. 이 두 가지 목표를 나는 달라이 라마로서가 아니라 인간이자 불교 승려로서 추종한다.”라고 말한다.

달라이 라마의 철학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보편적 책임감’이다. 보편적 책임은 인간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중생에 대해서,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달라이 라마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 폭력적인 대립, 자연 파괴, 가난, 굶주림 등―은 주로 인간들이 만들어 낸 문제들이다. 그런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인간의 노력과 이해, 그리고 동포애의 발현에 의해서만 해결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지구와 서로에 대한 선의와 깨달음에 기초한 보편적인 책임의식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믿고 있는 불교가 사랑과 자비심을 길러 주는 데 유익하다고 느껴 왔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종교를 믿건 믿지 않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발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또 모든 종교는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믿는다. 선을 장려하고 모든 인간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목적이라고 믿는다. 비록은 방법은 달라 보일지 모르지만 목적은 다 같다고 본다.11)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티베트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티베트를 통해 인류의 미래와 인류의 사명을 이야기한다. 그는 불교를 알리는 대신 각자가 지닌 종교를 환기시킨다. 자신의 전통적 종교를 통해 스스로의 영성을 관찰하라고 말한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유대인들 그리고 서양인들이 불교로 개종하겠다는 의향을 밝히면 극구 말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신 당신의 종교에 충실하라고, 어설픈 불교신자가 되기보다 자신의 종교적 전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라고 당부한다.

“남의 사정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을 덮어놓고 계속 찾다 보니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것”은 달라이 라마가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다.12)

기 독교인들과 불교인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가르침과 같은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상대방의 생활양식, 생각, 서로 다른 철학과 믿음들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 그것이 상호 간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된 조화와 함께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나는 언제나 이러한 특별한 내면의 발전이 인류를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3)

이 같은 태도는 달라이 라마의 대중국 외교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과 중국인들이 서로 번뇌를 극복하고 상대에 대해 품고 있는 혐오를 억누르지 못한다면 티베트도 중국도 진정한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행자 달라이 라마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류 전체의 행복과 그것을 실현하는 부처의 가르침이며, 이에 비하면 자신이 군주의 지위에 복귀하는 것, 티베트가 완전히 독립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달라이 라마가 강조하는 보편적 책임감은 불교인들을 위한 윤리가 아니다. 티베트인들만을 위한 윤리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바람직한 이상향을 제시한다. 그것이 세계인들로 하여금 그를 스승으로 받들 수 있도록 하는 가장 명백한 이유이다.

룸비니에서 석가모니가 탄생한 이후 한 승려의 사상이 세계를 이토록 감동시키고 이처럼 큰 파급력을 지녔던 적이 있었을까.

에필로그

필 자는 이 글을 쓰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한국에서만 해도 수십여 명의 기자들이 달라이 라마를 직접 인터뷰했고, 수만에 달하는 이들이 직접 달라이 라마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필자는 단 한 번도 달라이 라마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감히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본 사람이든, 그를 보지 않은 사람이든 달라이 라마가 몸소 보여 준 보편적 책임감, 인간에 대한 자비로운 태도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신 필자는 수년간 불교계 신문사에서 외국 불교를 취재하면서 느낀 것 한 가지를 쓰고자 한다. 그것은 달라이 라마, 혹은 티베트불교의 빛이 한국불교의 그림자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이다.

달라이 라마는 쉽고 평이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수많은 교리와 수행 체계를 모두 아우르는 다양한 수행법을 전달한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불교적이고, 수행자답다. 비불교적인 사사로운 것에 의탁하는 대신 최신 학문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신학문을 배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보통의 인간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지를 몸소 보여 준다.

붓다가 설법한 팔만사천 법문을 오늘에 맞는 대기설법으로 풀어 놓고 몸소 행하는 일이 현대의 승려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달라이 라마는 그것을 가장 많은 이들에게,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는 승려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는 달라이 라마의 아주 어렸을 적 사진이 놓여 있다. 오래전 알랭 베르디에라는 프랑스 친구가 준 것인데, 평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질 않다가도 마음이 아주 무거울 때면 그 사진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그때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어린 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기까지 살아온 과정과 그 힘과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지구 위에 그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를 직접 만날 수도, 또 아주 먼 훗날이 될 언젠가는 나 또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 알랭 베르디에 또한 그런 이유에서 그 사진을 준 것이라 믿는다. 그 사진을 받아 보고서 어설픈 영어로 기쁨을 전하자, 알랭 베르디에가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음을 지어 보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인간을 향한 애정,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역할 모델로서 달라이 라마만 한 인물이 있을까. 그것이 바로 세계인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열광하는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티베트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 전설에 의하면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의해 티베트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지만 그와 더불어 티베트의 불법이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리라는 것이다.

티베트인들은 그 전설이 현재 티베트의 처지를 예언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이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며, 오늘은 선업을 쌓아 다음 생에는 더 행복하고 고귀한 삶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매일 매일을 십만 겁의 일부로 살아가는 티베트불교,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는 하루아침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한국불교에 없는 그 무언가가 분명 있다.

오래되고, 느리며, 두터운 그 무언가를 추구하는 이들, 그리고 그 길을 인도해 줄 훌륭한 스승이 있다는 점이다.■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역사 전공 석사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석사논문으로 〈조선후기 왕실원당의 유형과 기능〉을 썼다. 현재 〈미디어붓다〉 기자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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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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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클리는 우리가 나무를 인식할 때, 두 종류의 나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생각, 즉 내가 한번 눈으로 본 후 내 안에 시각적인 관념(idea)으로 남아 있는 나무가 하나 있고, 그 배후에 나와 독립해서 나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따로 저 '바깥에' 존재하는 나무가 또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자주 인용되는 "모든 감각적인 사물은 관념이다. 이 관념은 '오직 정신 안에'(only in the mind)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는 지각되는 데 있다"(esse est percipi)라는 구절은 현실을 증발시켜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지각되며, 그 배후에 숨겨 있는 본체의 그림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한 것이었다.



C. A. and Peursen, 손봉호 강경안 역, 몸 영혼 정신 : 철학적 인간학 입문




한때 우리과에서 유행하던, 한 마디.

"관념하고있네."


이상하게, 요즘 버클리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생기고 있는데,

손아섭아. 아서라. 우선 관심은 조금 미루고, 하던 작업이나 계속 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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